2019년 11월 20일
아이폰 충전 케이블은 고장이 잘 난다고 하더라. 너도 그래? 나는 고장 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아예 처음부터 작동하지 않는 싸구려 케이블을 산 적은 있어.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 앞에 무릎 꿇은 영웅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너무나도 압도적인 아름다움. 파괴적인 매력. 꼭대기에 위치한 그런 것들이 나를 끌어당길 때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자신을 붙잡아야만 했다. 질질 끌리던 신발의 밑창은 가장 먼저 너덜 해져 발견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그저 그림 속에서만.
내가 잃어버린 것은 대개 그랬다. 베개의 눌린 자리를 보고 뭔가 누워있었겠지, 짐작하는 느낌을 끌어당겨 턱 아래까지 덮었다.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 잃는 비전공의 다듬어지지 않았던 어떤 것. 세련되게 물레를 차는 법을 배우면서 잃어버렸던 미숙한 흔들림. 얼핏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여운 없는 거.
길어진 공백을 어지러이 늘어뜨려서 그런가. 사소한 기척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박탈되는 순간 나는 세상을 잃었다. 의미 부여를 하지 않게 된 것은 과도하게 내 삶에 부여하던 의미들을 나 스스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방백으로나마 남기는 지우개 가루 덕에 외로움은 조금 덜었으나 그들도 이내 털어내어 눈 앞에서 없앴다.
서로가 주었던 별명을 불러도. 각자만 알 수 있는 시선을 털어놓아 보아도 그저 기억의 부스러기, 응시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의미가 나의 삶에 가져다주는 것은 쓰레기뿐이었고 난 매번 그것들의 봉투를 찢어 안의 것들을 손수 분리수거해야 했다. 측은하게도 이미 쓰레기로 여겨진 것들인데 소중히 여겼던 때가 많다.
내가 벽에 붙여둔 오래전 식은 핫팩. 지금은 잔돈을 대충 던져 넣는 스타벅스 컵. 버릴까 싶다가도 제자리에 다시 놓아두는 물건. 마치 마음에 들어서 옷걸이에서 빼내었으나 가격표를 보고 도로 걸어두게 하는 부담스러운 가격처럼 짓누르는. 한데 직접 손 뻗어 산 상품의 택은 처박아두다 보니 한데 모여있었다. 의도해서 모았던 택과 아닌 것. 전부 봉투 속에 쏟아버렸다.
싸구려인 나의 기분은 단 것을 먹고 열량을 태우면 혐오스럽게도 금세 좋아진다. 시스템은 아직까진 제대로 작동하고, 나 또한 아직 톱니바퀴 하나가 통째로 비어버린 기분까지는 닿지 못한다. 결함이 생겼을 때가 비로소 폐기되어야 할 때니까 그때가 오면 눈이 차가웠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싸구려의 가성비가 꽤 놀랍다.
사랑하는 표현인 눈이 따갑고 뱃속이 뒤틀리고 눈꺼풀 안의 찰랑이는 느낌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게 되었다. 마음에 부하가 가해지면 유연성 없는 난 금방 툭툭 부러지고 만다. 부러진 뼈가 다시 붙고 그것을 엮어 겨우 다시 버틸 수 있을 때쯤 부하는 더 커져 부러진 곳을 재차 엉망으로 망가뜨려서 매번 수고로이 새로 엮어야 하는 곳을 만든다.
아무렇지 않게 익숙한 피부로 살아가던 것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안 후에 해야 했던 희생의 예리함을 갈비뼈 사이로 느낀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연락은 사실 둘도 없을 걱정이었고. 투정은 투박하게 포장지에 싸인 사랑이었다. 베일은 사실 내 눈에서 걷혀야 했는데.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었던 것은 사실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네. 부모님도. 내가 살고 있는 집. 깨끗한 화장실도. 시답지 않은 농담도, 주머니 속 핫팩도. 모두.
나는 물건을 잘 망가뜨리지 않아. 잘 잃어버리지도 않고. 타의에 의해서 잃어버리면 정말 화가 나더라. 그 자체이던, 일부이던. 그래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을 봐도 기분이 썩 좋지가 않네. 마음도 물건이라고 생각해,
충전기의 연결부가 쉽게 망가진다는 것을 알던 먼저의 너에게 연결부를 보호하는 액세서리를 선물 받았다. 거추장스러워 사용을 미루다 케이블이 끊어졌다. 차마 바로 버리진 못하고 둘둘 말아 처박아뒀다. 작은 선물은 지금도 어디 갔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