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6일과 2019년 12월 6일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눈사람 자살 사건 / 달아실, 2019
몇 주 정도 됐나, 부쩍 눈이 잘 안 보여. 처음 안경을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23살의 여름에 했던 라식은 10년을 잊게 했다. 하지만 요 몇 주는 10년을 떠올리게 한다. 시력은 컨디션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눈이 건조하고 동공이 커 빛 번짐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수시로 추켜올리고 김서리 던 안경을. 군대에서마저 나를 매일 불편하게 했던 유리와 플라스틱을 기억 속에서 1년 동안 깨끗하게 지웠다. 삼십 분 만에 좋아졌던 내 시력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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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학원에 간 첫날.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연필을 깎는 법이었다. 신입생이었던 나를 빼고 친구들은 모두 그날의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홀로 쓰레기통 앞에 서서 어설프게 칼을 잡고 나무와 흑연을 함께 뭉텅이로 떨궈내던 손이 학원의 첫 기억이다.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마지막 기억엔 버티는 것이 남았다. 뭐든지 버티는 거. 우두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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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는 내게 지쳐 보인다고 말했다. 희수는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지 가장 먼저 눈치챈다. 손에 쥔 사탕을 놓아야 빠지는 항아리 속 손처럼 놓아버리는 것은 무언가를 잃게 만든 뒤에야 자유를 내준다. 잃어버림에서 오는 슬픔은 여기저기 쏘다닌다. 그렇게 삶의 저울은 다시 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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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나침반을 가지고 살아감과 같다. 항상 잘못된 장소에 데려다주는 지침. 그게 내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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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운 일들은 항상 쏟아지며 내려오곤 한다. 머리 위에 끼얹고 나면 머리카락이 얼굴에 착 하고 달라붙는다. 눈을 비비며 머리를 넘겨야 다시 시야가 또렷해진다. 어찌 내 속눈썹에 걸린 그들을 모른척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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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해 가끔씩만 펴보던 책의 표지의 가장자리는 이제 다 닳아 낡아버렸다. 가끔도 그 시간이 유한히 늘어지면 영원이 되는 걸까 싶은 마음에. 책은 항상 두 권이 만들어지니까 언젠가 한 번쯤은 낡은 내 것 말고 새 책을 볼 수 있을 성싶어 들락날락 대던 방의 문지방이 오늘따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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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곳에 힘쓰지 않기로 해. 새고 있는 에너지를 아깝게 생각하기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면 좋은 것들이 사실은 그저 오늘의 나 혹은 한 발자국 앞,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까지만 보장해준다고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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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사람을 보았다. 그건 견고해 보이던 성이 무너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슬픔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는 그때 그것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은 점점 진리로. 우산을 파는 아들과 짚신을 파는 아들은 나의 마음속에 살고 그 동네의 날씨는 누가 결정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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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기다리던 사랑이 찾아오면 좋을까 싶다가도 나는 이제 썩 좋을 거 같다는 느낌은 안 들어. 두 걸음 나아갈 곳에 한 걸음만 내딛고, 손 뻗어 닿을 것도 닿지 못하게 떨어뜨려 놓는 일 말이야. 자신 없으면 하지 말라는 말을 무시한 나는 후회를 잔뜩 사 온 자신이 되어, 하지 말걸 그랬네. 무심하게 하는 일이 참 많아. 무심결에 양말을 신은 채로 화장실에 들어가면 발 끝은 왜 이리도 잘 젖어버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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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만드는 일이 있다고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이 사람의 어떤 것이 좋고 어디가 좋은지 상고하지 않으면 안 됐다. 여행지를 정하고 그 여행지가 나온 영화를 보며 즐거운 상상 속에 뛰어들듯이 주객전도 되어버린 나는 좋아하는 마음도 역설로서 만들어보려 했지만 석고상은 절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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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난처하게 만들어서 미안. 내 마음은 항상 사람을 난처하게 해, 도착이 빠르던 느리던 결국 정지선을 넘지 않는 것이 규칙이니, 이제 상자에서 꺼내는 일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