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5일
잃어버림으로써 자유는 찾아온다. 너희들이 저기 멀리 두고 온 족쇄와 재갈처럼. 혹은 뒤로 한 채로 떠난 반지, 그 위에서 빠져나온 값진 보석처럼.
한결같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저 돌로 된 산도 언젠가는 무너져 내린 후 깎여 사라질 것. 나의 어릴 적을 현상하던 코닥이 몰락하고, 즉석 밥 한 개가 데워져 배달되는 시대가 왔듯이.
비교. 내 삶을 책임감만큼 깊이 꿰뚫은거. 나를 불행 위쪽으로, 가끔은 종종 행복의 문턱 앞으로 데려다줬던 거. 장난스럽게, 혹은 그 살점 안의 예리한 골봉으로 숨은 농담이었던 '비교하면 비참해지고 교만해져.'라는 말. 위와 아래. 정수리와 발바닥.
자신도 이해 못하는 선택과 심리. 이성과 논리로 설명하려던 내 삶에서 모순과 역설을 만드는 원석은 재련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믿거나 말거나 금화의 유통이 늘수록 금화 무게는 줄었고, 사람들의 손을 타는 광물 화폐가 손에 손을 거쳐 닳아 가벼워진 것이라고 믿는 이도 있었다. 짤랑대는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로.
사랑이랑 연애는 별개라는 것을 누군가 일러주었다. 그 말이 맞다. 명백하게도 연애는 나를 증명하는 트로피가 아니었지만, 나에게 사랑이란 것은 내가 살아있고 숨 쉬는 순간순간을 증명하는 삶의 품질 보증서와 같은 것이었다. 기회비용을 잃고 난 후의 곤궁함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고 견뎌내야 하는 따갑고 한심한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낭만을 원한다. 한 번도 원하지 않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원했던 사람은 없음을 안다. 자신만만하게 잡아당기나, 절대 0에서 들어 올려질 리 없다. 왜냐면 그건 무거운 것이니까. 목덜미 뒤에서, 등 뒤에서 나를 찍어 누르는 힘이니까. 준비되지 않은 근육은 파열을 겪고 뼈는 부러지니까. 자신 없으면 하지 말라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그때 내가 주섬주섬 꺼낸 객기는 또 하나의 관계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감자인 줄 알고 씹었던 생강의 생경함. 구멍 난 줄 모른 채 신고 나왔다 나를 민망하게 하는 양말. 온전히 내 것이 되어야 드러나는 하자들. 포장을 벗기고 박스를 열기 전에는 제조사도, 만든 이도 모르는 결함. 나사를 하나 덜 조였다고 비행기가 곧장 추락하지는 않겠지만 잘 체결되지 않는 개인 좌석의 안전벨트는 하늘길 여행 내내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며칠 전 일회용 외날 면도기를 처음 사봤다. 5중 날, 4중 날 면도기만 줄곧 써왔기 때문에 생소한 방식이었다. 면도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내가 느꼈던 감정은 참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귀찮기 그지없다. 깨끗하게 세수를 한 후에 면도할 부분의 피부를 불리고 크림을 고루 묻히고 신경 써 면도를 해도 어딘가 한 곳은 베인다. 날이 여러 개인 면도기의 메리트는 절삭의 용이보다는 안전함에 있다. 하지만 써오지 않던 일회용 외날 면도기도 여태껏 나를 지키던 안전함이 무색하게 나에게서 마땅히 떨어져 나가야 할 부분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어떠한 방식이나 견해는 편리와 편의에 의해서 명맥이 유지된다. 위태로운 외줄 위에서도.
가끔은 베이지 않는 아침도 있다. 이제 일도 아니다. '일도 아니다.'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탁한 말인지. 꾸안꾸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무슨 그런 게 다 있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인가. 했지만 금세 나의 짧은 식견을 비웃듯이 그 뜻을 이해하게 했던 이가 나타났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을 한 누군가가. 겨울이 생각보다 길다. 내가 봄의 살랑거리는 무언가가 주는 기시감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는지 봄은 빨리 오지 않고 질질 끈다. 앞으로 겪을 봄이 더 많겠지만,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봄을 기다리는 일은 일도 아니다.
끝난 관계를 여지없이 두고 오는 일. 코인이 다 소진된 게임기의 버튼을 더 이상 누르지 않는 일. 이제 그런 일은 익숙해서 오히려 쉬워. 다만 내가 어려워하는 것은 게임을 끝내는 좋은 방법. 주어진 코스트를 모두 소진하고 중간에 일어설지, 끝까지 버티고 해내서 클리어 유저 란에 내 이니셜을 적어 넣을지. 고민하는 내 호주머니 속 동전이 짤랑이는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