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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Sep 19. 2021

우리는 사회의 암묵적인 약속들의 안쪽에 살면서,

2020년 1월 27일


테세우스의 배. 판자를 갈아 끼우게 되는 시간이 늘어갈 때마다 배는 본래의 부품을 잃어간다. 마침내 모조리 새 판자로 교체된 그것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선택해야 했다.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형체였는지 상징성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면의 철학적인 해석 그 자체였는지. 거시적인 관점은 항상 나를 무기력하게 한다.


늘, 항상 살고 싶은 삶이 없듯이 항상 죽고 싶은 삶만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들은 사고와는 다른 범주의 것이었다. 삶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죽음에 가까워지는 삶의 역설. 개인의 역사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자동차가 고대인의 눈에는 빛과 괴성을 뿜는 철로 이루어진 마물 정도로 여겨질 것과 비슷하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는 자라 무언가가 된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사회에 속함으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일들. 버찌 씨를 가지고 가서는 사탕을 살 수 없다는 일 따위나, 순수한 마음만을 가지고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 따위의 것들. 맞닥뜨려 봐야만 높이를 체감할법한 벽의 최하단을 툭툭 발 끝으로 걷어차 본다.


턱이 또 절그럭 소리를 낸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있는 증상이다. 평생 떠안고 가야 하는 턱 디스크. 설계된 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위, 아래로의 움직임만이 할당된 기관에게는 앞과 뒤, 그에 더해 양 옆으로 움직이기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고장이 나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한 때는 영원한 것이 없어서 좋았다. 영원하다는 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었고, 그 직전 단계쯤 되는 지속 가능한 무언가는 곁에 있다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족감과 함께 그저 그런대로 좋았다. 영원하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으나 내심 나에게는 거추장스럽고 사치라 생각되어서 그만두었다. 당장 새로워 그토록 좋아하는 아침잠을 몰아내는 일의 흥미도 결국 따분함에 도달할 테니까.


여생을 쭉 즐겁게 해 줄 수 있을법한 일을 찾아보았다. 내가 대략적으로 찾은 어떠한 영원은 지불해야 하는 코스트가 꽤 컸다. 목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부러뜨려야만 했으니까. 아직 내 허리는 멀쩡하고 목도 부러지지 않았다.


귀납적으로 추리해낼 수밖에 없는 나의 본질. 배의 판자처럼 물리적으로는 7개월쯤이 지나면 모조리 교체되는 우리 몸의 세포들. 지금쯤 나는 '글헌 진짜 최종 50호.psd' 정도로 불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기억은 꾸준히 덧칠되는 유화와 같다. 가끔 발린 물감을 떼어내 본다. 맑음은 찾을 수 없는 그 색감.


가볍게 생각할 때에 갈 수 있던 곳은 내가 중히 여김을 간직한 동시에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를 스트레스 속에 파묻고 가는 그 사실. 갈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가고자 할 때 못 간다. 그렇게 못 간 곳을 셀 수 없어졌다.


누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했다. 내 바구니에는 계란이 없다. 한 알이 충격을 받아 깨지고, 둘이 깨어지고 별안간 모두 연달아 깨어질 일이 있던 게 아니다. 겨울잠에 들기 전 다람쥐는 숲 여기저기에 도토리를 숨겨둔다고 한다. 다람쥐가 겨우내 숨긴 먹이를 다 찾아먹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고 그 시스템은 이롭게도 울창한 참나무 숲을 만들어낸다. 나의 달걀은 나의 삶 곳곳에 흩어졌다. 그러나 정신없이 흩어놓은 알에서 병아리가 나올 일은 없다. 그저 잃어버린 것이다. 누가 주워가도 밟아 깨뜨려도 다시 찾을 일 없이.


내가 너무 안일한 삶을 살았나? 하며 돌아보면 발자취에는 분투의 흔적이 있었고 그들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로 규합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덤마다 있다. 혹자는 핑계라고 부르는 사건과 담화가 있다. 사실 재미없는 농담처럼 그것은 가치가 아닌 가취있는 일이거나.


겉도는 일은 나를 위축되게 한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이지만 굉장히 사회적인 동물인 모양이다. 빵을 집어 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남는 접시의 부스러기 라던지. 쓰레받기에 쓸어서 담아도 담아도 사라지지 않는 먼지의 마지막 모임.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오늘도 직접 빵을 썰고 빗자루를 집어 든다.


퇴고 없이 쓰인 찰박대는 옅은 글. 으레 이런 마음이 들 때가 되면 몸도 아는 것인지 뭘 하던 전부 불능한 상태로 설정한다. 때때로 운동을 취미로 삼고자 했던 내 마음을 실수라고 의심하게 만든다. 나는 본래 우울한 사람. 관자놀이의 지끈거림과 명치의 통증이 익숙한 사람. 나의 설은 또 비탄 속에 지난다. 화도 내지 못하겠다. 벽이 너무 높아서 구름에 닿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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