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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Oct 24. 2021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2020년 3월 16일

늘 같이 있어도 외롭다고 생각했다. 애처로운 가삿말처럼 피부를 비비고 안아봐도 나 역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함께 지낸 깊은 밤도 찰나로서 남았고 아직도 궁여지책으로 사는 삶과 비탄에 빠진 내가 남아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대부분 다 우리와 마찬가지라는 것, 하지만 군계일학. 유난히 아름다운 것의 쟁취를 위한 독립. 그런 자발적인 고립은 곧 아름다움으로 직결된다. 오리 무리 속의 백조처럼. 그 백조 중 돋보이는 검은 백조처럼.


좋아하지만 주머니가 얕아 불편했던 바지. 받은 용돈을 깊숙이 넣었지만 걷다가 다시 손을 널어보았을 때 아니나 다를까 주머니는 비어있었다. 배신감은 정말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곳에서도 피어나는 꽃. 생명력이 강하다. 바지 가격만큼의 돈을 잃어버린 바지에게 들었던 그 감정은 네가 깊은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들과 무심히 지나친 부재중 전화, 얼떨결에 들여다본 너의 전화기에 뜬 카톡 메시지까지. 모든 곳에 만개했다.


이제와서라도 그 꽃밭을 모두 불살라주어 고마워. 전부 타버리는 모습을 보고 긴 시간을 거슬러 더듬거리며 하나, 둘. 미련을 떠올렸다. 내가 버렸던 너의 정성들처럼 넌 내가 주었던 보라색 배경의 그림을 찢어버렸을까? 아니면 마지막으로 본모습처럼 너의 방 한편에 붙어있을까. 한 장뿐이던 폴라로이드 사진은 너의 지갑 속에 줄곧 들어있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쭉 한편을 차지했으면. 하지만 논외인 마지막 너는 달라. 선물한 프리지아가 어서 시들고, 그것만은 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아 주길. 가장 만발한 너의 꽃의 꽃가루는 나의 비염만 더 심하게 했다. 모두 태워주길.


내가 서 있는 땅도 결국 불안정한 거대한 맨틀 위의 대지이고, 지금 당장은 흔들리지 않고 있는 한 지점일 뿐이다. 느끼지 못하는 불안이 아닌 피부에 닿는 스웨터의 목덜미가 따가운지 부드러운지가 그 시간의 기분을 결정짓는 매듭이 되었다. 시골쥐와 서울쥐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귀감이 된다. 당당히 나 자신으로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닌 내가 훔쳐먹던 인간의 음식이 나를 증명하는 수단이자 트로피라고 생각했다. 수단은 수단일 뿐이다. 언제까지 완철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참 무르디 무른 생각.


구름 한 점 없이 달이 일찍 보이던 저녁. 밤의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밝아 해와 달이 뜬 시간. 누군가의 잠이 시작되고 누군가의 하루가 시작되는 날.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일들. 풀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유리병에 돌을 채우고 자갈을 채우고, 모레를 채우고. 물을 부어 빈틈을 만들지 않았다. 꾹꾹 눌러 담은 말들은 눈 밑의 그늘과 눈동자의 탁함을 거두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서 잠시 눈을 돌려 다시 한번 중력을 벗어나고자 했다. 떠오를 내가 가려했던 곳은 꽉 찬 보름달이 아닌 절반, 딱 절반이 기운 반달. 나머지 절반은 내가 채우고 싶었다. 대다수가 바라보던 달을 가리킨 손가락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손끝만을 보는 너희와 같은 땅에 서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게 했다. 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단 한 뼘이라도 떠오를 수 있다면, 너의 절반을 채울 수 있다면. 내가 그 월광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 마음도 같다. 주고, 받아본 사람이 잘 알겠지. 내가 잘 아는 건 딱 마음의 꽃봉오리까지. 피어나기 전까지만. 그런 내가 피어난 꽃을 어떻게 키우는지 어떤 꽃이 진정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인지 알 턱이 있나. 그리고 맞이한 정원의 꽃은 배신감의 향과 색. 너희도 모르니까 예쁜 줄로만 알고 같이 가꾼 것이겠지. 오리과 닭만 가득하다. 넌 백조를 본 적은 있어?


'키스의 고유 조건은 입술끼리 만나야 하고 특별한 기술은 필요치 않다.' 작년에 타이포 과제를 하다 발견한 팬그램 문장. 단순한 조건의 키스와는 다르게 내 사랑의 고유 조건은 어떤 것이었나. 쌍꺼풀,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 흰 피부에 붉은 입술. 그런 것들은 많으니까. 특별한 기술은 필요치 않다,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시각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검은 백조는커녕 백조도 구분 못하는 문외한.

우리 모두 코끼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맞는 듯 해. 다만 모두 눈이 먼 채로. 누군가는 코끼리의 다리를, 누군가는 코를 만지며 자신의 손에 닿아있는 것이 진짜 코끼리라며 서로를 논파한다. 결국 모두 같은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눈먼 자들. 넌 어디쯤이야, 코끼리 근처에 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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