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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Nov 12. 2021

석화의 계절에 올려보는 딸기의 계절

2020년 3월 22일

왜 이리도 보고 싶은지, 새벽은 힘을 가졌다. 적어도 내가 살며 겪은 새벽은 그랬다. 그곳엔 감정적인 힘도 포함되었다. 폭, 하고 서로 포개어졌던 입술의 시간, 은은한 밝기의 조명을 켜 두었던, 뭔가를 꾹 참고 질질 끌어와서 꽉 쥐고, 서로 깍지 낀 손가락 너머의 상대에게 애증을 뱉었던 때. 모두 새벽이었다. 아름다운, 혹은 구차했던.

글을 쓰지 말아야지, 얼마 못 가 손은 자판을 두드린다. 내 글은 수율이 너무 안 좋아. 제철이 아닌 어패류와 다를 바 없다. 먹을 건 없고 껍데기만 몽땅 남아버리는, 마침 계륵이라는 좋은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만두어 버리기에는 떠나 멀리 온 일.

익숙해진 일의 이야기를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글에, 아이클라우드 속 메모장에,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에 남기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아프면 당연히 약을 먹는 거지 뭐,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말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봐도 어떤 날은 양치보다 자주 했던 약을 삼키는 일이 이제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건조한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내심 속을 긁는다. 우울은 여러 외압과 자의에 의해 넘어뜨려져 쏟아졌지만 흩어진 그것을 닦아낸 천이 아직 우울을 머금은 채로 마음속에 남아있다. 축축한 기운은 벽지를 들뜨게 하고 얼룩을 만들어냈다.

꿈을 꾸지 않게 하는 항불안제가 자리를 비운 날, 꿈속의 동물원에서는 코끼리들이 전부 썩은 시체가 되어 나를 맞이했다. 꿈 속인데도 썩은 내와 당혹감이 전해졌다. 부패한 내 정신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 이후의 꿈도 모두 그런 불쾌감을 불러왔다. 식은땀이 났다. 자기 전에 먹는 손톱보다 작은 알약은 죽은 코끼리도, 너희들도 모두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까.

헛된 것을 쫓는 행위의 순수함. 내가 바라던 것이 대부분 결국 헛수고라는 것을 알던 나였기에 바람이라는 말에 담긴 너와 나의 이기심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좋았다. 무지개를 찾는답시고 저 멀리 사라진 소년이 믿던 것은 존재가 역할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솟으면 내가 간절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간절함과 고통은 이음동의어. 네가, 내가 부단히 바라던 것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되었나, 사라졌다.

뒤에서 나올 때 문을 잡아주고, 데이트할 때 의자를 빼주는 거. 차에서 내리는 상대의 머리 위 허공에 손바닥을 대주는 일. 삶에 필요하지만 알려주지 않는, 혹은 내가 언제 그 사용법을 배웠는지조차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 대체 어디서 사람 대하는 법을 배운 건지 되짚어보면 참 혼란스러운 태도의 모음이다. 사람은 하나인데 견해는 여럿이다.

그런 나에게 그저 구황작물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까탈스러운 나의 기근에 그저 궁여지책의 대용품. 당시에는 실망 없이, 또 어김없이 피어났고, 어디에서나 거둘 수 있다고 느꼈다.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쉽게 잃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강인하며 여린 것이라는 뜻. 하지만 미안한데 다 똑같이 느껴졌어. 천 원, 1달러, 100엔 정도의 차이. 그랬기에 굳이,

아무리 본위를 거창한 것으로 꾸며대도 결국엔 나에게는 놀이와 비슷한 수준의 일들이었나. 어른은 아이의 놀이가 위험한 것인지 대번에 눈치챈다. 너 또한 안전하지 않은 놀이터. 얼마나 싸구려 진심을 많이 받고 떠안았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너의 삶. 관능, 아름다움, 그것들이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아냐. 하지만 나까지 싸구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네가 내어준 공간 속에선 마냥 우울한 내가 살아갔었네,

조개껍데기와 진주의 성분은 같다. 영롱한 진주가 사실은 흔해 빠진 조개껍데기와 같다니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진지한 헛소리를 늘어놓기 좋은 사실이기도 하다. 본질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형태는 말보다 변호가 빠르다. 탐미하는 눈 역시 형태를 읽고 곧장 알아챘다. 아, 이것은 진주. 조개껍데기가 아니다.

조개껍데기인 나를 위한 글, 무의미한 헛수고.

꼭 며칠이 지나고 보아야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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