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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Nov 16. 2021

많이 가진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것

2020년 4월 15일

나약했던 내가 했었던 당시의 숱한 방황들과 어찌할 방도조차 몰라 손에 잡히면 잡히는 대로 마구 잡아 사용했던 용도 불명, 정체불명의 도구들. 한걸음 물러서서 보니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민망함에 나조차 눈을 피하면 누가 안아주겠는가, 누가 오롯이 이해하겠는가. 내가 해야지, 내가 직접 해야지.


삶의 규칙과 습관은 늘어났다. 이젠 잘 때 안경을 안전한 곳에 벗어두어야 하는 일은 없지만 가습기에 물을 붓고 세정제에 담가두었던 스플린트를 꺼내온 뒤, 주황색 약을 대충 삼키고 드러눕는다. 잘 때 발을 꼭 덮는다. 머리는 차갑고 발은 따뜻이 하는 게 숙면에는 좋다는데, 그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이미 쓸데없이 좀 치렁거리는 느낌이 든다.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낮잠을 자면 안 된다. 밤잠의 질이 떨어지니까. 옷을 얇게 입으면 안 된다. 얇은 옷으로 종일 보내고 나면 비염과 천식은 어김없이 아침에 함께 깬다. 지겨운 루틴이 아닐 수 없다.


건조한 계절 때문에 내내 시큰거리는 콧 속을 해결할 방법을 알아보다가 알게 된 비강에 식염수를 직접 들이부어하는 코 청소는 왜 진작에 하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효과가 좋다. 머리 안 압력을 유지하려면 입으로 아- 혹은 크- 소리를 내고 있어야 한다. 우스운 모양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식염수가 이관으로 역류해 중이염을 유발한다고 했다. 중이염의 위험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다. 가끔 귀에 물이 차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면 불쾌하긴 하다.


2000송이가 넘는 장미에서 단 1g의 로즈 오일을 얻는다. 어떤 것의 순도, 무결성은 필연적으로 압도적인 양의 불순물과 배제될 결함을 버려야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일.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각자 달리 모여 다시 하나가 된다. 꽉 쥐어 짜내어 증명해야 했던 숱한 사랑 때문에 항상 뒷목의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 순도의 기댓값에 미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쓸 수만 있으면 되는 그런 물건이 아닌 것. 바로 무결로서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곧 업이기에. 나의 삶의 목표가 존재의 증명으로 뒤집어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연애는 그대들을 증명하는 트로피가 아니라고 설파했던 나의 낯을 들지 못하게 했다.  


해가 온전히 뜨지 않은 시간. 새벽 이슬이 일광에 채 닿기 전,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아주 천천히, 혼자 남겨졌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현대에는 몇 없다고 느낀다. 어디선가 나와 다른 밤을 지새우고 있는 사람들과도 화면 넘어로는 금세 연결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스스로 훌훌 놓아버린 채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되는 시간이 이제는 더없이 귀한 일이 된 것이다.


도덕과 통념의 경계가 모호한 채로 지내온 삶이 비로소 스스로를 재편했음을 느낀다. 말 그대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고 여기게 한다. 보름을 묵혀가며 써낸 글은 순도를 증명하려 드는 것인지, 혹은 나의 필력을 시험하려 하는 것인지 자꾸 자판을 두드리는 손을 멈추게 한다. 1g을 구하는 방법을 재편 이전의 무질서의 가르침에서 어렴풋이 배웠으나 지금의 난 떨구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수치심을 인정하는 흐름 속. 당연히 단절은 무조건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감내가 강요된다.


양치 습관이 잘못 자리 잡은 탓에 무의식 중에 칫솔을 굉장히 빠르게 움직인다. 오른쪽 윗 어금니가 살짝 치열을 비껴서 나있어서 그쪽을 닦는데 굉장한 시간을 들인다. 칫솔을 고르는 기준은 좁은 악궁 구석을 잘 닦아 낼 수 있는지가 첫 번째가 되었다. 사용하는 칫솔 하나에도 규칙이 생긴 것이다.


부쩍 거울을 자주 본다, 정말 자주. 내 얼굴이 사라져 있을까 겁이 났다. 얼굴이 나는 아니지만 또 얼굴이 내가 아닌 것 또한 아니었기에. 눈, 코, 입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리 긴 시간 동안 바라보지는 않는다. 수척하고 꺼칠해진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공을 들이지는 않는다. 기르려고 마음먹은 머리가 참 더디게 긴다. 무심하게 다룬 입술이 많이도 텄다.


스무 살의 초입까지만 해도 각자의 향취를 뿜어 댔으니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아갔던 것만 같은데 각자의 자리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니 자신의 것을 쟁취해 이전의 향을 각자의 방법으로 갱신해버렸다. 그들처럼 과거에서 배움을 얻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난 아직도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어떤 식으로 잠들어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길, 머리를 쥐어짜 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조 말론 향이 나길 바랐다. 내 손목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대는 너는 한강 벤치에 멈췄다. 달큼한 것은 어지럽게 많이도 쏘다녔다. 며칠 전엔 이 글이 너무 맘에 들어서 유려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많은 글자를 지우고, 다시 써내리다가 아름다운 순간이 다 상했다. 난 변덕이 심하다. 보통은 괜찮았지만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은 언제나 쥐었다 놓은 손 이상의 공백을 남긴다.


분리수거가 되지 않은 글, 알루미늄 캔도 유리도 종이도 한데 뒤섞여 말 그대로 한강 가 쓰레기통이 따로 없다.


적은 행복, 어깨너머에 두고 오긴 했으나 돌아보면 즉시 엄습할 많은 불행의 이유들. 어쩜 이렇게도 안정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인지. 그래도 다행인 건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해. 여전히 그 광원이 다가올수록 난 그림자의 깊이를 더 깊숙이 파내야만 했다. 볼품없이 쌓여 흩어져있는 흙무덤이 살얼음판 위의 행복을 대변했다.


맑아지긴 어려워, 갈수록 탁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지내. 진짜 지독하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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