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헌 Nov 17. 2021

서로 지말만 맞다는 이성과 감정

2020년 4월 20일

그 누구도 목표로 하지 않은 사랑, 그 누구도 특정하지 않고 하는 비난 이상의 날 선 힐난.


아직 멀었다. 너무 멀어 발을 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여정이 될 것이다. 말을 예쁘게 하는 것은 일상에 여전히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 내가 상처 받지 않는 말을 골라서 조합해야 하는지 아직도 그 필요성은 나의 목소리에, 소지품 어디에도 전혀 새겨지지 않았다.


아, 참. 맞다. 그거 집에 있었지 하며 가끔 선반 깊숙한 곳에서 꺼내 쓰는 물건 따위와 다를 바 없다. 능숙하게 평소에 하던 대로 매끄러운 흐름의 결이 같은 단어들을 조합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근주자적, 근묵자흑. 생선을 묶은 노끈에는 비린내가, 향을 감쌌던 종이에는 향내가 배어 있는 것과 같은. 무의식과 시간이 함께 있는 화학 작용인 것이다. 한 순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 쉽게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 분해해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사를 풀고 못을 빼내어 뚜껑을 열었을 때 드러날 원인은 뻔하디 뻔하니까. 뻔해서, 안쪽에서 나를 볼 시선이 너무 지겨워서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뻔하니까.


또다시 길들여지지 않은 신발 뒤축의 거친 면이 여린 아킬레스건 위 피부를 긁는다. 머뭇대던 새 종이의 날 선 재단면이 스윽하고 내 손가락을 스쳐 온전한 표면을 둘로 가른다. 편히 누운 내 척추와는 대비되는 짜증 섞인 일상의 노크들은 도처에 깔려 주체에게 원초적인 짜증을 선사한다. 무례한 태도와 당당하고 당돌한 것의 차이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에게 배려심의 공간을 내어줄 필요는 없으나, 사회는 곧 현재의 일상의 필수품이 된 마스크, 위에 달린 끈처럼 부품들이 함께 협력해야 기능을 발휘하고 난 체제의 영역에 서 있기에 귀 뒤의 보이지 않는 피로함을 감수할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갖추지 못한 이는 감추어지지 않았으나, 명백히 드러나있다고 해서 누군가 그것을 큰 소리로 읊어 망신을 주는 일은 흔치 않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 이성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 약. 약을 먹는 것을 잊었다. 풍요는 빈곤을 자연스레 잊게 만든다. 망각은 정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치유, 괜히 장작 위에서 잠을 청하고 쓸개를 꺼내 먹은 것이 아니다. 와신상담. 나의 결핍에는 적절한 치료를 통해 새 살이 돋아났으나 그 패였던 자리를 잊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부모를 사랑하며 미워하고, 신발 뒤축의 너를, 날카로운 종이 날의 너를 미워하기 위해 뇌리에 흩뿌려놓은 증거들처럼 손에 잡히기도 한다. 아직도 내 방 침대 밑에서는 낯선 길이를 가진 밝은 탈색 머리카락이 나온다. 쓸개와도 같은 맛.


사실 약은 드라마틱한 기분 변화를 주지는 않는다. 효과는 실질적이지만 즉각적이지는 않다. 그저 체내에서 일정한 농도로 유지되면서 내 기분이 갑작스레 추락하지 않게 만드는 안전띠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매일 먹어야 하는 이유는 농도, 그저 그 안전띠를 매일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관리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성이라는 것은 가장 두려운 말 중의 하나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을 같이 묶어두는 것은 또 다른 항상성인 것을.


최근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결을 같이 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결이 같다. 한 결같다. 한결같다. 뭐 다 비슷한 말인데. 공백 하나에, 생략하고 꼬아서 말한 어순이 말의 느낌을 뒤바꾼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은 진실이 다가올 어느 날의 어딘가에서 자신을 드러낼 채비를 느릿하게 즐기는 것. 그 즐거운 준비가 끝나고 나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의 삶을 망치기 위한 외출을 시작하겠지. 휘적휘적 도망치고 빌며 용서를 구할 모습이 선해서 서글프다. 추하다 추해. 나.


날씨 탓을 해봐도 날씨도 내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정한 하나의 일기. 모든 것을 수단화했던 어린 나는 지금의 나를 비웃는다. 일상도 감정도 모두 공구 박스 안에 어지럽게 몰아넣은 꼴사나운 모습을 보며.


물을 13일 이상 먹지 않으면, 보통이라면 3분 내로 산소부족을 해소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 두 달 전에 죽어버린 나의 장례를 치르는 기간이 너무 길다. 흔한 속설 중에 다른 사람의 장기나 신체를 이식받으면 본래 주인의 기억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물며 난 허물도 남지 않는 고요한 탈피였을 뿐인데 작은 공유가 아니라 그 일익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날개를 접고 있음에도 기억이 어깨를 타고 눈에 비춘다. 풀은 물을 머금고 자란다, 영양은 풀을 먹고, 사자는 영양을 먹는다. 사자는 죽어 흙이 되고, 흙에서는 다시 풀이 자란다.


가서 철저히 부수고 발 밑에 깔보아라, 감정이 꾸짖었다.



작가의 이전글 많이 가진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