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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Nov 23. 2021

결혼식에 노란 장화를 신고 간 7살 아이

2020년 5월 5일

나의 7, 당시에 좋아했던 곰돌이 푸가 수 놓인 청자켓과 노란 장화는 이제 없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물건과 함께 그것을 좋아했던 마음도 없어졌나? 하면  확실히 대답을 내놓지 못하겠다. 있지만, 없으니까. 없지만, 있으니까.

너희들이 아직도 좋아하느냐고 물어오면 마찬가지로 즉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입고, 신을  없으니. 혹은 수중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장화와 청자켓의 면전에 대고 하는 일은 한때 사랑했던 것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유부단함에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아니다. 닳아서 버렸을지, 이사오며 사라졌을지 모를 장화와 누구에게 물려줬는지 의류수거함에 넣어져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렸는지 모를 청자켓. 추적할 수 있는 그대들보다 하잘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걸 보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얼굴들에 눈물을 쏟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욕지기가 비집고 나오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함께 파낸 우물의 깊이만큼 우물 위 빗물은 더 오래도록 떨어져야 땅에 도달할 것이 아닌가.

하늘에 있는 별도 달도 따줄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그 광채에 감탄한 적이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아름답다. 밤의 어둠이 있기에 더욱.


그러나 혹시라도 나의 마음이 동해서 이미 별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달이 이미 가방 속에 빛은 잃은 채 잠들어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겠지. 하늘에 걸려있기에 그들은 빛을 내고 아름다움 위에 손을 얹을 수 있는 것. 손에, 가방에 있었다면 진즉에 깔린 후 그 장엄함에 타 죽었을 테니. 범접할 수 없기에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쉽게 얻은 자, 쉽게 잃는다. 수중에 있다 사라진 세뱃돈을 보며 그렇게 처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무릎과 머리를 몇 초 조아리고 나면 어른들의 지갑에서 빳빳한 신권 지폐들이 정적을 깨고 등장했다. 당연한 일은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온 삶에 우연히 내려앉은 전통의 영향력, 그 수혜를 받은 탓인지도. ⠀


금전과 숫자의 가치를 알기 전에 동생들이 오백 원을 하나 가지고 있는 오빠보다 십원 짜리 10개를 가진 자신이 더 부유하다고 생각하며 재잘대던 것이 생각난다. 물론 어린 무지는 귀엽게 느껴진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오만 원 한 장과 천 원 열 장 사이의 결정에서 혼동하는 일이 귀엽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치판단기준은 너무나 다양하다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지는 않다. 줄줄이 써놓은 케케묵은 나의 글을 하룻밤에 몽땅 읽고,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오롯이 공감하는 일은 모조리 나의 기억인데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꽤나 어렵게 느껴진다.

한참 동안 몇 개의 글을 더듬댄 후 재고해보면 나의 가치, 판단, 기준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전혀 취합되어 있지 않다. 다양성의 존중이 오히려 복잡함의 존재를 만들어버린 것일까 하다가, 문득 실현 가능한 현실에서는 저울질에 능한 사람, 우선순위의 결정을 유보하지 않는 즉발적 성품이 얼마나 선호되었는지가 떠올랐다. 또 내가 유예를 둔 일들이 어떤 식의 화를 불러왔는지도.

라면이 언제 익었는지에 대해서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꼬들꼬들하게 혹은 푹 익혀서. 계란도 반숙, 완숙. 취향은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개인적인 선호일 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셔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과 탈이나 고생하는 사람. 그렇기에 유통기한은 취향이 아니다. 왜냐면 그 선을 넘으면 누군가는 어디선가 꼭 탈이 나니까.

언제 먹을지, 언제부터 먹어선 안되는지.

언제 확신을 얻는지, 언제부터가 사랑인지.


사랑은 취향을 타고, 사랑하지 않음은  기한을 정해놓는다. 결국 언젠가 모두 필히 상하기 마련.

근데 말이지, 순수한 꿀에는 유통기한이 없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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