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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Nov 24. 2021

우리가 서로를 가졌었을 때.

2020년 5월 16일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웃기는 말이다. 저런 말들을 가르치는 곳들이 모조리 무너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비슷한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랑받지 못한 시간들이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들리곤 하니까.


감흥 없는 시간들이 지속된다.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어서 곰곰이 생각하기를 여러 번. 5 들어서 비가 자주 온다. 바깥에 나갈 일이 많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에 빗물이 올라올  또한  없었다. 외출이 없난 나에게 빗방울은 체감 밖의 영역.


충분히 견고해졌다고 느꼈었는데 실제로는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나는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능력 부족으로 인해 막지 못한다. 방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은 공기를 모조리 빼어내고 기다려도 주위를 살핀 채 나긋하게 가장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고산 지대에 사는 사람은 적은 양에 산소를 가지고도 호흡할 수 있다고 한다. 가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본인의 위치를 유리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미리 정할 수 있는 것.


선점. 높은 곳에서 피선점자를 깔보는 눈이 떠올라 괜히 정수리가 따갑다.


선점하기 싫다. 선점되기도 싫다. 하지만 선점하는, 당하는 것은 어쩌면 행복한 일이다. 선점했다는 것은 선점을 위한 움직임이 끝을 맞이했다는 뜻이며 선점당했다는 것은 가치를 타인이 증명해주고 보증할 사례일 테니까. 그러다가 문득 선점은 가능성의 부재를 시작을 알리는 단어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울적해진다.


점유물에는 필히 흔적이 남는다. 지문이나 머리카락. 어떤 물건에는 체취가. 어떤 물건에는 일상의 버릇들이 남는다. 찌그러지고 긁히면서 사적 물이 된다. 셀럽의 점유물에 남은 흔적은 부가가치이지만 개인의 특정할  없는 흔적은 살펴볼수록 묘한 불쾌감을  .  


항상 사유할 권리가 사라져 버리면 점유물의 흔적을 살펴보는 일을 시작했다. 잃은 후의 시야는 아주 차갑다. 원래는 이 정도까지 두 눈이 얼어붙지는 않았건만 처음 느끼는 온도에서는 생경한 의구심이 자라났다. 난 점유 그 자체의 기쁨이 아닌 흔적을 사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 산 키보드에서 공장? 플라스틱? 낯선 냄새가 난다. 사용한 지 3년쯤 되어가는 맥북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개인 컴퓨터를 가져본 적이 이전에는 없기에 산 후에 굉장히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나만의 세상을 가진 느낌이 들어서. 전화기 터치스크린이 아닌 키보드 자판을 타이핑하는 일은 굉장히 즐거웠다. 밤낮으로 글을 쓰고, 좋아하는 것들을 왕창 적기 보기도 했다.


 . 자판의 배열, 타이핑 습관.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키보드 위에서는 생각대로 글이 써지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표현은 어색하고 말투는 경직된다. 단순히 도구의 느낌이 바뀌었을 뿐인데 표현까지도 저해를 받는다.


내가 점유물이 되었을 때. 상대방에게 그 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공고한 개인이며 너희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희가 나에게서 떠안을 실망은 점유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라며.


하나 반대로 누군가가 나의 점유물이 되려 할 때. 이기적인 나는 점유가 아닌 소유를 서둘러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점유는 불쏘시개와도 같았다. 활활 잘 타올랐다. 불나방이 아니라, 손에 총을 단단히 쥔 채 대비하고 기다리던 무언가가 그 불을 보고 홀려 나타나길 바랐다. 그러나 점유하는 시간이 다 타버리도록 소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나.


흔들리는 시야와 함께 초점이 잘 맞추지 못하는 내가 되면 몸이 정신과 연결하던 전원을 끊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라 인지한다. 잠들기 싫은 나의 마음과 하루를 만족스럽게 지내지 못한 욕구불만은 어느새 절친한 단짝이다. 물을 연신 마셔봐도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 침 삼키기가 어렵다.


밤을 새우는 것이 일상이 되기 전에 햇빛은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인식하는 햇빛은 푸른빛에 가깝다. 새벽은 보통 축축하다. 물을 머금은 공기를 들이쉬는 것이 익숙하다.


부쩍 얼음물을 찾게 되고 매운 음식과 기름진 고기에 식욕이 일고 구미가 당긴다. 모두 소화에 도움을 주지 않아 경계하는 음식들이다. 다시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긴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아마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다.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것이다. 개 같은 사과와 억지스러운 용서가 난립해서 그런지 관용의 가치는 추락했다. 우리들 사이에 관용은 없다. 그저 잠깐의 양해나 극렬한 미움. 그 두 가지뿐. 미움은 나에게 소유되었다. 이제 보니 양해를 구하는 일엔 점유된 흔적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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