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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Dec 08. 2021

나는 뭔가에 능숙한 사람을 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2020년 6월 26일

사랑을 알 나이에 자라서 이름이 사랑니란다. 치통을 주며 깊숙이 네 개가 났지만 아직도 사랑을 모른다. 두 개를 뽑았다. 나머지 둘을 마저 뽑고 잇몸의 구멍이 모두 새 살로 채워질 나에게 나는 사랑에 무지할 수 있는 정당성을 다시 주어야지. 애초에 없던 것처럼.

난 사랑에 대한 질문에 언제나 정답을 낼 수 없었다.

상대가 너무 높은 온도를 바라면 찬물을 끼얹고, 미지근하다면 장작을 더 넣으면 내 역할은 끝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호의 사랑, 연애의 어려움이 내가 대야에 받고 있던 찬물을 엎어버리고 뒷산에서 해온 나무를 몰래 숨긴다. 그 불친절은 익숙해지긴 커녕 어떻게 매번 겪는 족족 짜증이 난다. 빼곡한 오답노트를 신경질을 내며 한 페이지 넘긴다.

싸구려로 전락한 것을 값지게 포장하여 내놓는 일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심이 깊다. 완전하게 현실 같은 가상을, 실재하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가짜를 구분 짓는 일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고찰은 훌륭한 철학자들도 오랫동안 답을 내지 못한 문제. 하지만 완벽한 가짜를 만들기에는 내가 부족함을 깨닫고 이내 고민을 놓는다.

별거 아닌 TV 방송이 누구나 안정적인 사랑의 종착을 꿈꾸게 한다. 보고 있노라면 언젠간, 누군가, 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이가 사랑을 꿈꾸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짜 삶에서의 진짜 사랑은 강가의 모래 속 사금과 같이 스스로 쉽게 발견되길 원치 않으니까.

나는 사랑에 인색하다. 그 야박한 성품의 기저에는 애정의 가방끈이 짧은 채로 팽개쳐져 있고 눈을 조금만 돌리면 무지하지만 애써 흉내 내려 노력하던 어설픈 내 모습이 함께한다.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너니까.

진짜를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무지의 베일 뒤에서 넘어오지 않으려 하는 멍청이들이라고 치부했던 일이 생각난다. 과거의 편협한 사고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내가 한 곳에 몰아두고 무지한 자라고 절하했던 사람 중 몇몇은 베일 뒤가 아닌 내가 닿지 못한 지속 가능함에 도달해 있다.

열망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진다. 노력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진다. 절대. 불변할 인과의 중력이다.

생각이 많은 동물은 잠도 편히 들 수 없다. 에디슨도, 달리도 많은 걱정을 머리 위에 얹고 잠을 청했다. 손에는 쇠붙이를 든 채. 자신이 잠에 들면 떨어져 바닥의 요란한 소리를 불러올 쇠 공과 쇠 숟가락이 열망하지 않는, 노력하지 않는 너머의 자신을 깨워주길 바라며.

없다가 있었다. 있었다 없어진 사랑니의 빈자리에 자꾸 들어차는 것들. 엎어뜨린 찬물에 죄의식 하나 없는 눈빛. 숨겨버린 장작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 심보. 언젠가 사금을 찾으러 강물에 발 담글 일이 생길까 봐 두렵다. 업보는 반드시 회귀하니까.

글이 구리다. 대화도 작업도 그림도 일상도 관계도 모든 종류의 사랑도. 연료로 하는 것이 모두 같다. 그래서 항상 고갈되고 항상 일부 항목은 결핍을 겪어야 한다. 녹슨 톱니바퀴가 겨우 아귀를 맞춰 삐걱대며 돌아가는 모습. 그것이 최근에 거울 속에서 본 이미지이자 나의 느낌이다.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의 사랑이 들어올 곳도, 그들을 위해 열어 줄 창문을 낼 수도 없다.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적어도 내 껍데기 안쪽만이라도 열망하던 것으로, 노력하던 것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니. 기어코 채워내어 바라 마지않던 고립을 완수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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