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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an 10. 2022

불을 쓰게 된 인간이 여전히 날 것을 먹는다는 것은,

2020년 11월 21일

오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것을 샀다. 일주일 내내 익히고 간단하게 조리된 음식만 먹어온  모습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너는  것을 먹어라. 그래서 얼마나 삶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지 느껴라.

위험한 일은 도사리고 있다. 주머니 속의 영수증이 바스락대길래 꾸깃하게 구겨버리려  잡았을 , 함께 찍어준 스테이플러 심이  손가락을 파고든 것처럼.  피가 흐르고 낭자한 채로 널브러져야 상처인가? 금세 사라질 절륜한 통증이 손가락에 있을지어다.

빨간 하트. 이 시대의 비극이로다. 유리를 두 번 두드리면 책의 표지가 넘어간다. 얼마나 자주 비극적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됐었냐고 묻는다면, 내 전화기에 뭍은 내 지문을 보여줘야겠다.

연락이 너무 잦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유가 그곳에서 기다린다. 난 변했다. 번지점프를 수 없이 하는 나를 죽이고 삶에 언제나 쉽게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는 미끄럼틀을 달았다. 안전띠도 필요하지 않고 준비도 필요 없다. 미끄러진 나는 그나마, 그나마 안전한 호스를 타고 땅에 도달한다.

왜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게 설계된 삶이 보편적으로 변했을까, 다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독점하기 위한 일이다. 다행인 건 그 독점의 녹을 나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모른다고들 하는데, 네가 꿀꺽 삼키는 마른침에서 물을 따라 가져다주는 내 손이 보임은 왜인지.

엉망진창이 된 일들을 깎아내고 풀어내어 정리했다. 아직 쓰레기 수거차량이 올 때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전보다는 보기가 좋다. 유리는 유리끼리. 종이는 종이끼리. 나는 어디에 속해있을까. 나는 무엇과 함께 내동댕이 쳐질까.

나도 누군가의 편협함의 수혜자이자 희생자. 과거에서 배움을 얻는 인간의 습성에 의해서 밀려난 우선순위 였, 던 것들.

어려서 나의 감상이 마냥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이 그냥 극복하지 못한 장애물에 대한 묘사처럼 보일까 봐서 두렵다.

굴은 사람을 쉽게 아프게 한다. 바다가 더러워지고 위생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낭비라고 필터링되어 들리는 단어인 것이다. 굴을 먹을 때 배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먹게 된다. 가족들과 간 바다에서 먹은 굴은 며칠 동안 나를 소파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는 환자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나의 기호에 선택받은 이유는 뭔가, 맛이 있나 하면 별미 정도. 도사리는 위협에 대한 동경. 죽은 것만 먹게 된 일상에 대한 반항심.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 조차 튀김 속 굴에 대해 사색했다는 사실에 대한 모방.

감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끊기지 않기를 바라면 필연적으로 끊기더라. 이어져 있어도 툭, 툭, 간헐적인 연결만을 제공하는 이기적인 연결이라도 좋다.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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