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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an 12. 2022

아이팟의 추억은 2000년대에 두고서.

2020년 11월 23일

나는 그냥 이 숱한 밤을 함께 지새울 상대가 필요했다. 스킨십도 사랑도 뭐도 염두에 둘 필요 없는 그냥 가만히 같이 있어줄 베개 같은 사람이.


바람은 충족되었고 어려움을 겪던 바퀴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자력으로 해냈다고 하기에는 도움이 많았지만 물병의 뚜껑을 연 것은 나니까 이번 공은 나에게 돌리기로.


사진을 남기고, 오래된 기계를 샀다. 능동적으로.

멋진 사람들은 본인을 남기기를 즐겨한다. 오늘의 나를 기록하고 내일의 나를 내다보는 일은 즐겁다.

머리가 이렇게 부하게 뜬 줄 몰랐다. 몇 년 전에 맞춰놓은 턱의 대칭이 어느새 조금 틀어져 있었다. 담백한 말로 위로하는 친구가 되어준 거울과는 다르게 사진 속 나는 또 다른 담백함으로 적나라하게 나에게 길을 제시한다.

아직도 지나간 시간에 채우지 못한 욕망 채우기. 불만이 발생한 시간대의 나를 찾아가 물어보기.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신가요? 하고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충족시켜 줄 것.

밀어서 잠금해제. 블루투스가 아닌 줄 달린 이어폰. 시대를 역행하는 수준의 작은 화면이 내가 며칠 전 찾아간 내가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충족되었고, 입을 닫았다.

나는 그냥 이 새벽을 함께 보낼 상대가 필요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지껄이며 모래성을 쌓는 나를 무감각하지만 촉촉한 눈으로 바라봐줄 상대가.

감사를 수 없이 전해도 모자라지 않다. 누군가는 자신의 조그마한 찻잔에, 누군가는 감사함보다 부담이 앞 설정도의 큰 양동이에 모래를 퍼 담아 가져다주었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나면 날짜를 확인한다. 11월의 끝자락이 성큼. 남은 한 달의 2020년은 자의로 불태워질 가능성이 높다. 잿가루가 날리고 마당의 모래성에도 그을음이 묻어났다.

비유가 적은, 은유가 적은. 글을 쓰고 나면 재미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함을 느끼는 나의 모습은 좋은 징조이다. 편안함이 왔음을 뜻한다. 나의 즐거움은 언제나 저기 저 뾰족한 바늘 끝 첨단에 위치한 평원에 있으니까.

순간인가? 그래도 뇌리에 스친 느낌은, 두터운 짜임의 후드를 덮은 포근함. 잘 때 틀어둔 가습기의 연무가 얼굴에 떨어지는, 린넨향이 가득한 내 방.

처음으로 내가 성별 없는 무성의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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