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3일
나는 그냥 이 숱한 밤을 함께 지새울 상대가 필요했다. 스킨십도 사랑도 뭐도 염두에 둘 필요 없는 그냥 가만히 같이 있어줄 베개 같은 사람이.
바람은 충족되었고 어려움을 겪던 바퀴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자력으로 해냈다고 하기에는 도움이 많았지만 물병의 뚜껑을 연 것은 나니까 이번 공은 나에게 돌리기로.
사진을 남기고, 오래된 기계를 샀다. 능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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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람들은 본인을 남기기를 즐겨한다. 오늘의 나를 기록하고 내일의 나를 내다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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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이렇게 부하게 뜬 줄 몰랐다. 몇 년 전에 맞춰놓은 턱의 대칭이 어느새 조금 틀어져 있었다. 담백한 말로 위로하는 친구가 되어준 거울과는 다르게 사진 속 나는 또 다른 담백함으로 적나라하게 나에게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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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지나간 시간에 채우지 못한 욕망 채우기. 불만이 발생한 시간대의 나를 찾아가 물어보기.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신가요? 하고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충족시켜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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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서 잠금해제. 블루투스가 아닌 줄 달린 이어폰. 시대를 역행하는 수준의 작은 화면이 내가 며칠 전 찾아간 내가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충족되었고,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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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이 새벽을 함께 보낼 상대가 필요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지껄이며 모래성을 쌓는 나를 무감각하지만 촉촉한 눈으로 바라봐줄 상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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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수 없이 전해도 모자라지 않다. 누군가는 자신의 조그마한 찻잔에, 누군가는 감사함보다 부담이 앞 설정도의 큰 양동이에 모래를 퍼 담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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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차가워지고 나면 날짜를 확인한다. 11월의 끝자락이 성큼. 남은 한 달의 2020년은 자의로 불태워질 가능성이 높다. 잿가루가 날리고 마당의 모래성에도 그을음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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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적은, 은유가 적은. 글을 쓰고 나면 재미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함을 느끼는 나의 모습은 좋은 징조이다. 편안함이 왔음을 뜻한다. 나의 즐거움은 언제나 저기 저 뾰족한 바늘 끝 첨단에 위치한 평원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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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인가? 그래도 뇌리에 스친 느낌은, 두터운 짜임의 후드를 덮은 포근함. 잘 때 틀어둔 가습기의 연무가 얼굴에 떨어지는, 린넨향이 가득한 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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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내가 성별 없는 무성의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