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갚은 고양이 (8편)

50년 만에 화가의 꿈을 이룬 나의 미술, 음악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

by 김경미

음악, 영화, 미술에 빠져 살던 중학생


초등학교 때 겪은 소외감과 열등감의 상처는 내가 어떠한 환경에서 살게 되거나를 막론하고 나를 항상 비주류 쪽으로 이끌었다.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듯이 학창 시절, 늘 선생님들과 가까운 친구들은 집안이 부유하거나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교적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음에도 선생님과 좋은 환경의 친구들,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늘 소외된 친구들 편에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선생님에 대한 반항기와 부유한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 약자들에 대한 동질감 등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러한 환경적 요인과 언니, 오빠들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즈음부터 라디오 음악에 빠져 살게 되었다. 특히 언니들이 즐겨 듣던 라디오 심야방송을 6학년 무렵부터 거의 빠짐없이 청취하며 팝과 포크 음악에 매료되었다. 당시 유명했던 심야프로인 ‘0시의 다이얼’을 4년 동안 개근하듯 매일 청취하며 당시 유행하던 모든 팝, 포크음악을 섭렵하다시피 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포크 가수들이 출연하는 라디오 공개 방송을 주 1-2회 가곤 했다. 또한 그때부터 영화에도 빠져 온통 방송국과 극장가를 맴돌았던 것 같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당시는 지금처럼 수행평가도 없었고 대부분 외우는 공부가 전부였으므로 시험 전에 반짝 벼락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성적을 올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중학교 3학년 때 가정 형편상 상업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영화와 음악에 빠져 살았다.


당시에는 중, 고등학생이 극장을 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했다. 중, 고등학생들은 빵집, 분식집 조차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휴일에도 각 학교 학생주임 선생님들이 일부러 극장가, 빵집 등을 돌아다니시며 아이들을 적발하여 계도했었기에 나는 학교의 규제가 미치지 않는 의정부 극장가까지 진출 범위를 넓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기 부탁드린다. 나는 누가 봐도 당시 기준으로 불량학생이라고 지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단지 음악과 영화가 좋아서였을 뿐 분식집, 빵집에서 남학생들과 어울리거나 옆으로 새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행선지에 대해서 항시 엄마의 허락을 받고 다녔다. 80세 되시던 2004년에 별이 되신 나의 엄마는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거의 100세에 가까운 옛날 노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게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던 자유롭게 하라. 다만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라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엄마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방송국 공연, 극장가 순례도 모두 흔쾌히 허락하셨다. 지금 생각해 봐도 자유 영혼의 소지자인 오늘날의 나는 엄마가 만들어 주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학교 1-2학년 때 특별활동은 음악 감상반이었다. 이유는 클래식 음악이 좋아서였다기 보다는 음악 선생님이 좋아서였다. 나는 당시 언니들의 영향력 아래 성장하곤 했는데 작은 언니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기에 언니가 좋다고 하는 선생님은 무조건 함께 좋아했다. 당시 음악 선생님은 커다란 키에 안경을 끼신 모습이 딱 전형적인 음악가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음악가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초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큰 키에 안경 쓴 모습이었으므로 어린 내게 그렇게 각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2년간 음악 감상반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기에 내가 요즘도 늘 라디오의 클래식 FM에 다이얼을 고정시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중학교 시절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통 음악과 함께 했었다. 한 밤중에 숨죽이며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끼고 심야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또는 공개방송 등에서 포크 가수들이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잠자리에 누우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꿈을 꾸곤 했었다.

내가 기타를 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팝송을 부르는 상상, 그도 안 될 것 같으면 하다 못해 미래의 나의 아들이라도 기타를 아주 잘 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곤 했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첫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화분 하나를 교실 가운데 동그마니 세워 놓고 학생들에게 드로잉을 하라고 시키셨다. 학생들에게 드로잉 기법이나 이론적인 말 한마디도 없이 그저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로 화분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미술시간이면 내심 자신감이 솟아났으므로 순식간에 멋들어지게 그림을 완성했다. 내가 보기에도 근사하게 원근법을 적용하고 명암까지 처리해 놓고 선생님의 칭찬을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수업시간이 끝나도록 선생님은 단 한마디도 안 하시고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시기만 하셨다.


다음 미술 시간도 마찬가지, 무려 한 달간 동일한 수업을 계속하셨는데 나는 처음 그렸던 그림을 계속해서 손질하며 정성을 들여 완성도를 높여갔다.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나의 그림은 내가 봐도 훌륭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선생님은 한 달에 걸친 화분 그리기 수업과정에서 그 누구에게도 칭찬도, 그 어떤 지도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나는 간혹 생각하곤 한다. 그 미술 선생님의 그와 같은 수업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본인의 교육이념을 실천하신 것일까? 나는 아쉬움 속에 – 다 완성해 놓았다고 생각하면서도 - 한 달간 만지작만지작거렸던 작품을 버리지 못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책상 서랍에 보관, 시시 때때로 꺼내 보며 스스로 뿌듯해하는 한편 당시 무관심했던 선생님을 생각하며 약간의 서운한 마음을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만일 지금까지 그 그림이 내게 남아 있었다면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에 그림을 살포시 접어 누가 볼 새라 어디로 인가 슬며시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자만심에 부풀어 그린 그림을 지금 다시 보게 된다면 얼마나 졸작이었을지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린 시절 나의 그림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의 하나였을 뿐이다.


3학년 때는 미술반에 등록했다. 그러나 고입 연합고사에 대비하기 위해 3학년의 특별활동은 석 달 정도만에 끝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술반 선생님은 고운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특별활동 첫 시간 내가 석고상 쥴리앙을 드로잉 한 작품을 보고 말씀하셨다.


“너는 꼭 미술대학에 진학했으면 좋겠구나!”



여성의 삶에 대한 생각 - 평생직장의 꿈


가정의 경제적 부침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평범하게 보내지 못했기 때문인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생각이 참으로 많고 복잡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나는 왜 나라는 존재로 태어났을까?”라는 말도 되지 않는 명제를 가지고 혼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 극도의 유복함과 가난을 번갈아 체험한 덕분인지 나는 또래보다 일찍 성숙했다. 특히 중학교에 이르러서는 남편에 의해 사모님이 되었다가도 하루아침에 시장에서 호떡을 구워 파는 아줌마로 전락하는 등 부침을 거듭하는 엄마의 삶을 보며 여성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얻은 결론은 여성도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인 남성 한 사람에게 평생을 기대어 살아간다는 것이 대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라는 생각이었다. 나 자신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래에 있을 나의 아이들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자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인 나도 평생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 같은 다짐을 실현하기에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저녁 아버지와 오빠가 나를 불러서 나의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상업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였다. 큰 언니는 장애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지만 오빠와 위 두 언니들은 어찌 됐던 대학 진학을 위해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유독 막내인 내게 여상 진학을 권유한 것이었다.


하기사 어려운 가정 형편에 네 자녀를 먹이고 가르치시기가 얼마나 힘에 겨우셨을까! 막내에게 여상 진학을 권유하는 부모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마음 한구석 서운함이 왜 없었으랴! 그러나 나는 그 순간 흔쾌히 아버지와 오빠의 여상 진학 권유를 수용했다.


학교 미술 선생님은 내게 미대 진학을 권하셨음에도 나는 그때 왜 일언반구 없이 부모님의 여상 진학 권유를 흔쾌히 수용했을까? 내가 가정 형편을 십분 이해하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효녀여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당시 어린 내게는 여상 진학을 권유하는 아버지와 오빠가 원망스러웠지만 눈물 콧물 흘리며 대학 보내 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것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 나는 대학 따위 가지 않아도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어”라는 자존심!


도대체 혼자서 무엇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눈물을 흘리며 대학 보내 달라고 떼쓰며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중학생 소녀였던 나의 평생직장의 꿈은 메마르고 거친 사막의 신기루, 언덕 저편의 무지개가 되어 허상처럼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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