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시작한 지 만 오 년 만에 첫 그룹 전시회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최초로 다녔던 화실에서는 매년 봄 회원들이 함께 정기 동행전을 개최했다. 그동안 직장 일로 준비 시간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어 계속 참여를 미루다가 퇴직 이듬해 용기를 내 동참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수채화를 시작한 지 삼 년이 되어가지만 제대로 지도받을 기회가 없었기에 도무지 그림에 발전이 없었고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선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전공자인 화실 선배에게 수채화의 기초를 잠시 배운 것이 전부였으며 열심히 모작을 하였을 뿐 내 작품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마음속에 커다란 위기의식이 찾아왔고 무엇인가 새로운 길이 열려주기만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화가 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되어 나는 그룹 전시회 참여를 약 6개월 앞두고서야 처음으로 정식 수채화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2021년 2월 초 개최된 그룹 전시회를 위해 약 3개월을 준비했는데 첫 전시회를 앞둔 소회를 잊을 수 없다. 화실 회원 20여 명이 참여한 전시회에 수채화를 그리는 회원은 단 세명뿐이었다. 나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소품 위주의 그림을 그렸다. 전시회를 앞두고 DP를 하는 날 왜 그렇게 나의 그림이 초라하게만 느껴지는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으리만큼 스스로에게 부끄러움뿐이었다.
섬유미술을 전공한 작은언니로부터 “전시회는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마치 관객들 앞에서 발가벗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는 위로의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제야 여러 다른 그림들 사이에 걸려 있던 나의 그림들에 대한 애정이 물씬 솟아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시회에 걸렸던 내 그림 8점 중 4점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떠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지인들이 나를 격려해 주기 위한 의도로 구입해 주신 것이겠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누군가 내 그림을 원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그림을 판다는 것은 마치 귀한 딸을 멀리 시집보내는 느낌과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중한 자식이 어디를 가더라도 사랑받고 잘 살아 주기를 바라는 어미의 심정이 되는 것 같았다.
첫 전시회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전시회를 앞두니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배가되었다. 마치 시험이 코 앞에 이르러서야 밤을 새워 공부하 듯이 전시회 준비를 통해 집중력을 배양하고 그림 실력을 키워 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전시회가 끝나자 나도 모르는 사이 실력이 한 단계 발전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끊임없이 고민하고 집중해서 그린 그림을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는 과정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리라.
미술 공모전 도전
첫 전시를 마치고 스스로 한 단계 발전했다고 느껴졌던 그림이지만 모든 학문이나 예술, 세상사가 그러하듯 매번 발전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감도 한순간, 곧바로 슬럼프가 찾아왔다. 한 동안 즐겁기만 하던 그림 그리기가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고 점차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게 조금이나마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했다. 온종일 종이와 물감만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나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도전의식을 다시 깨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한 그림인데 예서 포기할 수는 없지.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나의 그림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받아보고자 하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첫 전시회에서 그림이 몇 점 팔렸다지만 그것이 나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2021년 5월,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미술공모전 공고를 보게 되었다. 한국여성작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제31회 한국 여성미술공모전이 그것이었다. 첫 공모전 참여이니만큼 어느 정도 전통도 있고 큰 부담 없는 적절한 규모의 공모전이라는 생각으로 도전을 결심했다.
선생님 외에는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조차 공모전 도전을 알리지 않았다. 그저 혼자 휴일도 없이 미사랑에 나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계속 연습을 거듭하면서 공모전 준비에 매진했다. 아이디어를 얻으면 자료를 찾고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다.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수차례 실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어린 시절 우리 집 뒤뜰을 생각하며 장독대 옆에 피어 있던 수많은 꽃들 중 보라색 도라지 꽃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나 도무지 100% 흡족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국 공모전 마감을 보름 정도 남겨 놓고서 한 작품을 더 그려 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그려야 하지? 깊은 고민 끝에 갑자기 내가 1년 가까이 드로잉 해왔던 고양이 제리, 보리의 그림이 떠 올랐다. 그래, 항상 나와 함께 생활하며 살아가는 녀석들을 한 번 화폭에 담아보자 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