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까? 아련히 떠오르는 최초의 기억은 60년대 초중반, 햇살이 쏟아지는 마루에서 따뜻한 우유를 타 주시던 엄마, 조그만 쟁반 앞에 두 다리 뻗고 앉아 마시던 서너 살 무렵의 나의 모습이다. 세월이 조금 지나 노랑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쪽 대문에 매달려 그네를 타며 학교 간 언니, 오빠를 기다리던 나는 1남 4녀 중 막내로 언니들이나 오빠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노란빛에 가까운 갈색이었고 눈이 커서 동네에서 튀기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우리 집은 서울 정릉 청수장 인근에 자리 잡은 하늘색 대문과 담장 위를 온통 장미 덩굴이 덮고 있던 단층 양옥이었다. 초봄이면 뒤뜰에 앵두꽃이 화사하게 피어났고 매년 5월이면 빨간 장미꽃이 만발하여 대문과 담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여름이면 언니들과 꽈리 꽃 열매를 따서 꽈리를 불어 댔고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으며 엄마는 여름에는 앵두로, 늦가을이 되면 뒤뜰 고욤나무 열매로 술을 담그시는 등 집안 곳곳에 풍요로움이 가득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유치원을 다닐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당시 유명했던 사립 초등학교 중 하나였던 모 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할 만큼 나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었다. 불과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나버린 짧았던 영화였지만.
햇살 가득한 안방은 꽤나 넓었으며 화려한 자개로 장식된 옷장과 사방탁자, 엄마의 화장대, 빨간색 자개 삼층장으로 꽉 차 있었다. 응접실에는 소파와 탁자, 그리고 당시 흔치 않던 전축이 있었기에 집 안에서는 항시 비틀스, 클리프 리처드 등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네에 유일하게 우리 집에 TV가 있어 그 당시 지금의 프로 야구만큼이나 인기 있었던 레슬링 중계라도 있는 날에는 인심 좋은 엄마 덕에 온 동네 총각들이 모두 몰려와 TV를 함께 시청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보기 어렵던 전화, 냉장고, 피아노는 물론 다소 먼 거리의 초등학교까지 아침마다 작은언니와 나를 태워주던 자가용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나의 삶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그 당시에 우리 이웃에는 치과의사, 변호사를 부모님으로 둔 언니와 나의 친구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려 놀았고 같은 사립학교에 입학하여 등굣길이면 서로 번갈아 가며 자가용으로 카풀을 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유복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는데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더불어 나는 오랫동안 지난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그 해 9월 공무원으로 임용되기 전까지의 그 기간이 내 인생에 아마 가장 고달프고 힘겨웠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사업실패로 집안 사정이 어려워 지자 부모님은 당시 작은언니와 내가 다니던 사립 초등학교 등록금을 제 때에 납부하지 못하셨다. 나는 3학년 때부터 항상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등록금과 수업료 독촉을 받곤 했는데 철 모르던 어린 내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고 학급 친구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급기야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선생님은 밀린 등록금을 언제까지 낼 수 있는지 다그치셨는데 열 살 꼬마이던 나는 다른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등록금 독촉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엉겁결에 오늘 중으로 엄마가 가져오실 것이라고 거짓말로 얼버무리고는 교무실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결국 그날 엄마는 오지 못하셨고 그 이후 나는 죄인처럼 선생님을 피해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불과 열 살짜리 꼬마가 견디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었다. 대부분 유복한 집안의 자녀들이었던 같은 반 친구들은 수시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등록금 미납 독촉에 시달리는 친구가 어떤 위치인지를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멀리했고 선생님이 등록금 독촉을 위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모두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수군거리곤 했다. 나의 4-5학년의 기억을 돌아보면 내게 기억에 남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 친구가 내게 말을 건넨 기억도, 도시락을 함께 먹는 기억도, 대화를 나눈 기억 조차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 칭찬 한 마디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나를 지명하여 발표를 하게 한 기억도 전혀 없다. 그저 나는 투명인간처럼 그 자리에 항상 혼자 동그마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체육시간은 가장 싫어하던 시간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체육시간에 짝짓기 놀이를 할 때였다. 노래를 하며 빙빙 돌다가 선생님께서 갑자기 숫자를 대시면 그 숫자만큼 짝을 지어 모이는 놀이인데 어떤 그룹에도 끼지 못하고 남는 자가 탈락하는 게임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경험한 놀이일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이면 항상 어느 그룹에도 끼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1차부터 탈락되곤 했다. 그 누구도 선생님께 미움받는 나를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경험은 내가 향후 성장하며 살아가는 동안, 심지어 결혼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나는 항상 혼자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부유했다. 늘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해했고 거절감에 대한 상처로 인해 친구를 사귀거나 남편을 만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별것 아닌 문제들로 항시 혼자 힘들어하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