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화가의 꿈을 이룬 나의 미술, 음악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
유일한 나의 위안과 기쁨은 미술 시간이었다. 당시 내가 다녔던 사립 초등학교는 일찍이 교과 담임제를 채택하여 미술, 음악 과목은 화가와 전문 음악가 선생님이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을 만큼 조기 예, 체능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학교였다. 덕분에 나는 합창반에 소속되어 당시 광화문에 있던 시민회관에서 공연한 백설공주 뮤지컬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당시 내가 받은 유일한 칭찬은 미술시간뿐이었다. 그것도 단 한 번뿐이었지만. 5학년 어느 날 미술 시간, 그날의 선생님의 칭찬은 내가 뒤늦게나마 화가의 길로 가게 된 원동력이 되어준 운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날은 셀로판지와 실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닷속을 표현했는데 셀로판지로 물고기와 바다 풀들을 만들어 스케치북에 붙이고 나서 마지막으로 실을 가지고 스케치북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랗게 물고기 모양으로 이어 붙여 마무리했다.
나는 별것 아닌 것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유독 내 작품을 가지고 교단으로 나아가셔서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칭찬을 해 주셨다. 실을 가지고 자질구레 여기저기 붙여진 바다 생물 전체를 크게 아우르며 마무리를 한데 대해 극찬을 해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칭찬의 내용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늘 소외되었던 상처투성이의 꼬맹이, 선생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했던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내 작품을 가지고 교단 앞으로 나아가서 칭찬을 하셨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는 자신감과 기쁨으로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 사건이 초등학교에서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칭찬과 관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특별한 근거도 없이 스스로 “나는 미술에 소질 있는 아이”라는 자긍심 속에 살았던 것 같다. 교과서며 연습장, 공책 그 어디든 조그만 틈새라도 있으면 새까맣게 낙서를 해댔다. 매년 추석이면 차례를 끝내고 언니들과 추석 음식으로 도시락을 만들어 스케치북, 크레파스를 들고 산에 올랐다. 당시 정릉 청수장 인근에 살았던 우리는 조금만 올라가도 북한산을 탈 수 있었는데 언니들과 산 중턱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도시락을 먹으며 놀다 내려왔다. 어느 해인가는 스케치북에 산 풍경을 멋들어지게 그린 후 나무 그림 위에 소나무 껍질을 직접 붙여 장식하여 그것을 보신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르고 콜라주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던가!
6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더 이상 사립학교를 다니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신 부모님은 나를 집 근처의 공립학교로 전학시키셨다. 어느 날인가 전학 수속을 마친 나는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당시 담임 선생님은 어떻게 전학을 가는 내게 같은 반 친구들에게 인사할 기회조차 마련해 주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나의 전학을 섭섭하게 생각해 줄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해도 말이다.
공립학교로 전학한 이후 나는 비로소 그저 그런 평범한 아이로 살아갈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가정 형편도 최악이 아닌 중하위에 속하는 정도였다고 할 수 있었다. 여러 명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서로의 집에도 놀러 다니며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립학교 다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적도 수직 상승하는 등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네에서 함께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나 그들의 부모님과 마주칠 때면 나는 어디로 인가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깊은 열등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인가 내 앞에 검정 자가용 한 대가 멈춰 섰는데 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치과의사집 언니 친구의 엄마가 웃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친절한 목소리로 집까지 태워 줄 테니 차에 올라타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두 손으로 가슴에 붙어있던 공립학교 명찰을 가리고 말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의 나는 왜 그렇게 우리의 가정형편이 부끄러웠던지… 어린 시절 이처럼 평범치 못했던 경험들과 상대적 빈곤감에 따른 열등감이 나의 이후에 삶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나는 그 상처 극복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모르게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