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갚은 고양이 (5편)

50년 만에 화가의 꿈을 이룬 나의 미술, 음악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

by 김경미


고난 속에서도 피어난 행복의 기억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우리 집에 본격적으로 궁핍함이 몰아닥쳤다. 집에 있던 냉장고, 피아노, 전화, 전축, 소파, TV 등에는 빨간딱지가 붙여졌다. 애지중지했던 나의 피아노가 어느 날인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실려 갔고 그 뒤로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실려 나가던 날 나는 마루에 누워 “내 피아노, 내 피아노…” 하며 통곡하듯 울어 댔었다. 엄마는 그러한 내게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를 드셨는데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쓰리셨을까?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작은언니를 따라 치과의사집 친구네 놀러 갔던 나와 언니는 그만 그 집 거실에서 얼어붙은 듯 멈춰 서야 했었다. 바로 거실 앞 언니 친구 방 안에 그 피아노, 나의 피아노가 떡 하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채무관계에 쫓겨 집을 나가셔서 어디로 인가 피해 다니셨고 엄마는 그래도 5남매를 키우시겠다고 미용실도 운영해 보고 그것도 여의치 않자 당시 넓고 방이 많았던 집을 이용, 잠시 동안 여관을 운영하기도 하셨다. 나의 은근한 자부심의 하나였던 매년 장미꽃 만발하던 하늘색 대문, 바로 그 위에 “신일 여관”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던 그 시절이 나의 유년시절 중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슬픈 기억이다.


엄마는 거의 매일 혼자서 여관 영업을 위해 불순물이 묻은 모든 침구들을 직접 손빨래 하셔야 했고 하나밖에 없던 오빠는 한창 대학입시에 열중해야 했을 열여덟 무렵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여관 종업원 역할을 해야만 했었다. 경험도 없이 여관을 운영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기에 불과 2년여 만에 그만두시고 엄마는 지금이야 보험 설계사라고 일종의 전문직으로 평가받지만 과거 70년대 보험 아줌마로 불리던 보험사 영업사원으로 일하시거나 아주 잠시였지만 한 때는 북아현동 시장 언덕길에서 호떡을 구워 팔기도 하셨다.


엄마가 집을 비우시면 주로 둘째 언니가 동생인 나와 작은언니에게 끼니를 챙겨 주었는데 어느 해 겨울방학에는 쌀도 떨어지고 먹을 것이라고는 소면 한 주먹 정도밖에 없었나 보다. 그렇게 며칠을 언니가 끓여준 소면 몇 가닥으로 끼니를 때웠던 그 시절이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에서 작은언니와 나의 키가 가장 작았는데 아직도 작은언니와 나는 한창 성장기 때 영양부족으로 우리의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은 것이라고 요즘 말로 웃픈 이야기를 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엄마가 생활전선에 나선 가운데 내게 유일한 즐거움은 언니, 오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언니가 많아서인지 아무리 막내라 해도 유난히 철이 없던 막내였다.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지 시샘도 굉장히 많았고 언니들이 무엇이든 척척 다 해주니 스무 살이 넘도록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만큼 철이 없었다. 특히 두 살 터울 작은언니에게는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좀 심한 동생이 아니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이다.


엄마는 잠자리에 들 때 항상 나와 작은언니 사이에서 우리를 재워주셨는데 내가 잠들기 전 혹여 엄마가 언니 쪽으로 몸이라도 돌릴라 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대성통곡을 할 만큼 샘이 많았다. 워낙 숫기도 없어 초등학교 때까지 작은언니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놀았고 문방구에서 학교 준비물을 구입하거나 교내 매점에서 빵을 사 먹는 일조차 혼자 하지 못하고 언니에게 의지했다. 오죽하면 초등학생 작은언니가 엄마에게 “왜 쟤는 나만 쫓아다녀~~”라고 울며 하소연을 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유달리도 벌레를 무서워하는 막내가 재래식 화장실의 벌레 때문에 볼 일을 못 보고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둘째 언니가 알아서 화장실 바닥을 비로 쓸어 벌레를 퇴치해 주었고 대학입시를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다 바퀴벌레라도 기어 나오면 그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자는 언니들을 깨워야만 했다.


그렇게 철없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거의 매일 작은언니를 따라 집 뒤편 작은 산 중턱으로 올라 가 놀았다. 그곳을 우리는 “축대”라고 불렀는데 주택 신축 후 산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돌을 높이 쌓아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축대로 올라가면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그대로 숨 쉬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그 같은 공터를 그냥 놔 둘리 없었을 텐데 그 당시는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런 자연 그대로의 공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내내 축대는 자연의 선물을 그대로 간직하고서 어린 내게 정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철 따라 들국화, 산 나리, 진달래, 개나리, 아카시아꽃 등 야생화가 자라나는 축대에서 봄이면 쑥, 냉이 등 봄나물을 캐고 장맛비가 내리면 도랑을 만들어 물길을 내며 놀았고 겨울이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밟고 뛰며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을 해댔다.


부모님 두 분이 외출이라도 하시면 우리들 만의 자유 시간이었다. 넓은 온 집안에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잡기 놀이를 하다 서로 부딪쳐 깔깔대며 웃어 대던 기억들, 어느 겨울밤에는 오빠와 서로 장난을 치다 그만 오빠가 마루에 들여놓은 커다란 선인장 화분에 그대로 뒤로 넘어져 등이 온통 선인장 가시로 뒤덮이는 사고가 나기도 했었다.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갖 장식품을 직접 만들어 마루에 들여놓은 화분들을 이용해 집안을 꾸미는 것도 매년 빠뜨리지 않았다.


또 하나의 특별했던 기억은 오빠와 보내던 시간이다. 오빠는 나와 여덟 살 차이로 당시 고등학생이면 누구나 한 번쯤 빠져봤을 통기타를 어디선가 구해 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리 잘 치는 실력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그 누구보다 멋지게 보였었다. 수시로 기타를 치며 내게 노래를 시켰고 나는 그때부터 오빠의 기타 치는 모습을 흉내 내며 기타를 가지고 놀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오빠가 느닷없이 그 당시 유행하던 “검은 고양이 네로”라는 노래를 틀리지 않고 부르면 5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지금도 예전에도 나는 가사를 아주 잘 외우는 편인데 3절까지로 이어진 “검은 고양이 네로”를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멋들어지게 불러 5원을 벌기도 했었다.


나의 철없던 어린 시절 언니, 오빠 들과의 추억은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받았던 상대적 빈곤감, 박탈감에 따른 많은 상처들을 치유하는데 그나마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록 현재도 그 상처 후유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 아닐지라도 퇴직 후 미술과 음악활동을 즐기고 있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자양분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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