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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4. 2022

그저 완벽하지 않았을 뿐이야_ 페루 쿠스코

 쿠스코는 멀리서 보면  잿빛에 가까운 도시다. 마치 다 타고 남은 연탄재로 지어진 것처럼.

약간의 고산병 증세 때문인지 매일 흐린 날씨 탓인지 쿠스코에서는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카페인이 필요했고 짐을 풀자마자 카페부터 향했다. 기대 이상으로 쿠스코 커피는 고급지고 맛있었다. 쿠스코 지역의 고유 커피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이 도시를 돌아보니 유네스코 도시답게 고풍스럽고 깊은 운치가 느껴졌다. 골목길 곳곳에는 깊은 세월의 여운이 묻어있었고 건물 깊숙한 곳에서는 오랜 흔적의 묵은내가 났다. 흔한 스타벅스 간판조차도 쿠스코스러웠다. 

 이곳에서의 한류의 인기는 더 대단했다. 내가 한국 사람임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자꾸 한국 드라마 결말을 물어본다. 한 페루인은 안재욱의 열렬한 팬이라고 했다. 그는 안재욱의 데뷔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꿰고 있었고 안재욱이 불렀던 노래 제목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는 자리에서 안재욱의 <친구>를 한국말로 열창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웠지만 그를 호응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리액션에 그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나는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그를 응원해주었고 그는 쑥스러운 듯 노래를 마쳤다. 페루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고, 특히 가사가 참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아까부터 옆에서 얌전히 그를 기다리던 꼬마도 그런 아빠가 부끄러웠는지 몸을 베베 꼬며 깔깔 웃는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애는 내 눈으로는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구분이 안 갔다. 모자를 깊이 눌러썼고 바지를 입었지만 큰 눈망울에 웃는 모습이 여자아이 같아서 딸이냐고 물어보자 ‘손녀’라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크게 놀랐다. 그는 어림잡아 30대 초반으로 밖에 안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17살에 결혼을 했고 아들은 18살에 결혼했다고 했다. 지금 자신은 37살인데 이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페루에서도 아주 흔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젊고 유쾌한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큰 영광이었다. 


 다음 날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긴 이동과 체력이 필요한 일정이 몰려있기에 오늘 하루는 바쁘게 여행 준비를 해놓기로 했다.   

우선 볼리비아 비자를 받으러 볼리비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비자가 필요한 남미 국가로 한 번에 비자를 받았다는 후기를 본 적이 없기에 꼼꼼하게 서류를 챙겨갔지만 역시나 퇴짜다. 대사관을 막 나가려는데 비가 쏟아진다. 당연히 우산은 없다. 부랴부랴 서류를 다시 챙겨 대사관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담당자가 없다. 점심시간이란다. 사정사정해서 겨우 담당자를 만났고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는지 맘이 급한 담당자는 내가 애써 준비한(아까는 퇴짜를 놓았던) 서류를 훍어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어준다. 심지어 돈도 안 받았다. 이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이번에는 내일 마추픽추로 떠날 교통편을 예약했다. 이제 마추픽추에 다녀 올 짐만 챙기면 오늘의 할 일은 끝이다. 

 마지막으로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에서 같은 호스텔 친구 카를로스를 만났다. 고산병 때문에 코카잎을 산다고 하니 그는 스톤을 보여줬다. 스톤에 코카잎을 갈아서 돌과 같이 씹으면 효과가 배가 된다고 했다. 신기하게 스톤에서는 달달한 맛이 났다. 스톤은 신기했지만 당장 필요한 코카잎과 내일 이동하면서 먹을 간식을 넉넉히 사고 돌아서는데 신기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의 입(주둥이)만 잘라놓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 모습이 처음에는 좀 경악스러웠다. 용도가 궁금하고 어떻게 먹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는데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화를 낸다. 돌아서는데 또 다른 가게에도 보이길래 웃으며 물어보려는데 마찬가지로 주인아주머니가 화를 내시며 내쫓는다. 더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이유가 있겠지’ 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일 나는 마추픽추를 보러 떠나야 한다.     


 마추픽추를 보러 가는 여정은 쉽지 않다. 물론 한 번에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이 있지만, 말도 안 되게 비싸기 때문에 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동할 것이다. 

먼저 쿠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오얀타이탐보까지 이동한 후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를 타고 아구아갈리엔테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드디어 마추픽추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아구아갈리엔테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나는 기차 안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학생들과 함께 저렴한 숙소를 구했다. 일행은 세 명인데 침대는 싱글 하나뿐이었고 온수는커녕 수건 한 장 조차 없었다. 이를 달달 떨어가며 겨우 몸만 씻었고 머리를 감는 것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다. 수건 대신 티셔츠로 대충 몸을 닦고 좁은 침대에 겨우 몸을 구겨 넣었다. 

내일은 그냥 씻지 말아야겠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눈 뜨자마자 바로 마추픽추행 첫 차에 올랐다. 새벽부터 서두른 이유는 미리 예약해 둔 와이나픽추를 무사히 보기 위해서다. 와이나픽추는 하루에 입장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입장시간을 꼭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30여분을 달려 드디어 마추픽추에 도착했다. 쿠스코에서부터 마추픽추까지 무려 1박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먼저 와이나픽추 입구에서 인적사항을 간단히 적고 산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와이나픽추는 마추픽추를 마주 보는 봉우리로 꼭대기에 오르면 마추픽추를 내려다볼 수 있다. 와라즈에서 지겹게 산을 오르던 기억에 자신만만하게 산을 타기 시작했지만 이곳도 경사가 만만치 않아 생각보다 힘들었다. 새벽에 급하게 나오느라 물만 겨우 챙겼는데 벌써부터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어제저녁도 부실하게 먹었다. 

오르는 도중에 칠레 친구가 말을 걸었다. 내가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나. 동양문화에 심취해있는데 특히 일본문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나나 하나를 나눠주었는데 마침 너무 고마웠다. 

칠레 친구와 함께 와이나픽추 정상에 올랐는데 마침 그곳에 10여 명의 젊은 일본인 그룹이 모여있었다. 칠레 친구는 아이처럼 좋아했고 생각보다 일본어를 잘했다. 곧 그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는 다 같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칠레 친구는 자기 핸드폰을 내 손에 꼭 쥐어주며 일본인 친구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니 꼭 자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달란다. 나는 영혼을 끌어모아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봉우리 사이사이로 구름이 겹겹이 쌓여있다. 융단처럼 드리운 구름이 제법 장관이었다. 구름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 구름 어디쯤에 마추픽추가 숨어있다는 것일까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런데 한 일본인 친구가 봉우리 하나를 가리키며 오늘 날씨가 무척 좋아서 곧 마추픽추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모두가 행운이 가득하기 때문이란다. 참 기분 좋은 친구들이었다. 

칠레 친구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일일이 이메일 주소와 페이스북 아이디를 주고받는다.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서서히 구름이 옅어지기 시작하자 봉우리를 알려주던 일본인 친구가 모두 모여야 한다며 소리를 친다. 우리는 순식간에 모여들었고 구름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이내 구름 사이로 숨어있던 세상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아래 가려졌던, 산 봉우리 사이에 숨어있던 요새 마추픽추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상당히 웅장했고 비현실적이었고 경이로웠다. 모든 구름이 젖히고 맑은 햇살과 하늘이 드러났다. 

와이나픽추 아래 산봉우리 사이로 절묘하게 세워진 모든 비경을 눈에 담았다. 카메라로는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눈에 새겨 넣었다. 

와이나픽추를 내려와 이제 마추픽추를 가까이 보았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마추픽추는 아침에 보던 경이로운 느낌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유명한 여행지라는 게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와 정보로 기대치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추픽추에 대한 수많은 후기와 정보를 익힌 만큼 그곳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있었다. 너무 유명한 곳이니까 안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마추픽추가 우리나라 조선시대쯤에 지어진 거라고 비교해보면, 글쎄.

우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유적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비스러운 시선으로, 경이로운 자세로 바라볼까? 우리나라에도 훌륭하고 신기한 유적이 넘쳐나는데. 

마추픽추가 훌륭한 유적임에는 분명하지만 조금은 과장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멕시코에서 보던 고대 유물이 훨씬 더 신비롭고 경이롭다. 

하지만 새벽에 와이나 픽추에서 내려다보면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그 경이로움은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와이나 픽추 아래에서 구름 위에 갇혀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멋진 장관을 보기 위해 마추픽추를 만든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봤다. 

그냥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이든, 유명한 관광지든 직접 내가 만나보고 만져보고 느껴봐야 오롯이 알아볼 수 있다.

다른 이의 백 마디 말보다백장의 사진보다수많은 후기보다떠도는 험담보다

나의 오감이 나의 감정이 나의 생각이 나의 판단이 세상에서 가장 옳다. 


유명한 관광지인만큼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에(남미 최고 수준)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실망감에 원망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한 것이 아닌가. 무엇을 원망할 수 있을까? 

인생에는 흑과 백이 존재하고 그것엔 명암이 있다


그저 멋진 것을 보겠다는 호기심과 열망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단지 오늘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 뿐이다. 

‘남들이 다 가는 곳이니까’ 라며 선택한 것도 역시 ‘나 자신’이다.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본 마추픽추는 얼마나 멋었었던가!  

그저 완벽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완벽할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면 세상은 더욱 반짝거리는 것들로 가득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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