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율 Oct 25. 2022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처럼 바람처럼_ 볼리비아

 고산병은 쿠스코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아주 가벼운 감기 증상이었기에 그저 컨디션 때문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살짝 장염 증상을 보였을 때도 단순히 음식 때문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에 도착하고부터는 장염과 감기몸살이 한꺼번에 왔고 그제야 고산병임을 알아챘다. 

 처음 코파카바나에 도착했을 때부터 난 이곳에 반했다. 내가 상상해왔던 가장 남미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고산병이 시작된 이후로는 우유니 사막을 위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코파카바나는 남미에서 가장 큰 호수인 티티카카 호수 마을로 호수는 페루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과테말라의 아티틀란과는 또 다른 매력이었는데 바다처럼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물감을 풀어놓은 듯 비비드 한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림엽서나 동화책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예쁜 마을이다. 

첫날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호스텔에 묵었다. 창문 너머로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수십 대의 배가 떠있었고 드넓은 수평선 뒤로 붉은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파도가 없었지만 마치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호스텔에서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이라 서둘러 밖으로 나서는데 바로 옆방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만났던 언니들이었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고 “언니들 나가요” 나의 한마디에 우리는 함께 노을을 보았다. 

첫째 날은 외롭지 않게 아름다운 코파카바나의 노을을 함께 했다. 볼리비아의 황홀한 첫날밤이었다. 


 다음 날은 호스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마을을 휘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마을은 넓었다. 호수 안쪽까지 들어가 보니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엽서에 나올 것 같은, 마치 풍경화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 한참을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통통배 한 대가 물 위로 들어온다. 그물을 정리하더니 한 식당으로 들어선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나선다. 

오전 내내 자전거를 탔더니 마침 배가 고팠거든. 메뉴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멸치처럼 생긴 것을 한 접시 가득 튀겨 가져온다. 빙어튀김 같았다. 이건 무조건 맛있는 비주얼이다. 보자마자 맥주를 한 병 시켰다. 환한 대낮이지만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르른 풍경을 보며 바삭한 빙어튀김과 시원한 맥주를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게 힐링이고 이게 행복이지.

그들은 빙어가 너무 많아서 나눠준 것이니 맥주값만 내라고 했다. 이건 행운이니까 한 병 더 마셨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진 못했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장염에 시달렸다. 그때는 고산병이 아니라 빙어 때문인 줄 알았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아픈 것보다 너무 예쁜 이곳을 더는 못 볼까 봐서.

 

 다음 날은 이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태양의 섬’으로 향했다. 호수가 어찌나 넓은지 코파카바나에서 배로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섬 입구부터 말도 안 되게 예쁜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니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가 끝도 없었다. 사방으로 탁 트인 수평선이 펼쳐져있었고 이곳에서는 일몰과 일출을 모두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호기심과 기대감에 1박을 해보기로 했다. 마침 다른 배낭여행자들도 숙소를 찾고 있길래 따라 들어갔는데 아뿔싸…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생각에 별생각 없이 간단한 소지품만 챙긴 것이다.

숙소가 이쁘고 마음에 들어서 너무너무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는데 갑자기 배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계속된 장염에 일부러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또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심한 것 같지 않아서 일단 참아보기로 한다. 몇 분을 걸었을까. 또다시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배 안에서 만났던 한국인 일행이 내 안색을 보더니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다. 사실대로 말하기가 창피하기도 하고 말할 기력도 없어서 별 것 아니라 했다. 그런데 계속 신호가 끊이질 않았고 조금 더 올라가 보니 인가도 없는 허허벌판만 쭉 이어졌다. 허허벌판에서 볼일을 볼 순 없을 것 같아서 일행에게 말도 못 하고 뒤돌아서 미친 듯이 뛰었다. 눈에 보이는 호스텔 아무 곳에나 들어가 화장실을 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이 예쁜 풍경을 두고 아픈 게 억울했다. 

장염 증상이 점점 심해져서 호스텔 주인에게 약을 구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내 증상을 듣더니 고산병인 것 같다고 했다. 몇 가지 약을 챙겨주면서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2주 정도 예상한 볼리비아 일정은 이제 겨우 이틀째였고 무엇보다 남미의 하이라이트 “우유니 사막”이 남아있었다. 

과연, 무사히 볼리비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우유니 사막은 다녀올 수 있을까? 그날 밤도 나는 아쉬움에 눈물이 났다.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슬프고 아쉬웠다.

    

 우유니로 떠나기 전 코파카바나의 마지막 날, 여전히 코파카바나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미어지도록 아쉽다. 마지막 날 옆방 언니들과 함께 아침을 먹기로 했다. 장염으로 고생 중이지만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스프라도 한 그릇 먹을 생각이다. 창문 너머로 보니 호수 위에 먹색 구름이 가득하다. 오늘은 날씨가 별로인 모양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언니들이 오질 않아 언니들을 깨우러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언니들이 “지금 밖에 무지개가 보여!!!!!” 

라며 흥분하고 있었다. 밖에 먹구름이 가득한데 무지개라고?

언니들을 따라 창 밖을 보니 정말로 호수 위로 무지개가 피고 있었다. 우리는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사이 무지개는 더 커지고 선명해졌다. 살면서 그렇게 큰 무지개는 처음 봤다. 보라색까지 선명하게 뿜는 예쁜 무지개를 처음 봤다. 너무 감동적이었고 황홀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모든 순간을 새겨 넣었다. 여행하면서 가장 아프고 힘든 이 순간들이, 이 모진 비바람들이 모두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신기루처럼 나타난 무지개처럼.

코파카바나는 나의 마지막을 그렇게 배웅해주었다. 나는 이곳이 무척 그리울 것 같다.


 라파즈에서는 다행히 숙소에서 한국인 일행을 만났다. 친구 둘이서 함께 여행 온 여대생들이었는데 사소한 대화에서도 활력이 퐁퐁 솟았다. 그녀들과 함께 있으면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한식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라파즈에 아주 유명한 한식집이 있다나?

라파즈도 고지대라서 여전히 고산병이 낫질 않아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한식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비싼 금액이지만 너무 간절했다.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세상에, 삼겹살이 들어가 있다. 최근 들어 이렇게 배부르게 음식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배가 찢어지도록 먹었다. 한국에서 먹던 찌개보다 훨씬 맛있었다. 정말로 내 인생 3대 김치찌개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고산병이 싹 사라지는 듯했고, 고산병에 지친 내 몸에 모든 세포들이 다시 자극받은 기분이었다. 싹 비운 밥공기를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고산병에 아팠던 서러움과 머나먼 타국에서 이렇게 맛있는 한식을 먹고 있다는 감격이 뒤섞여 그냥 눈물이 났다. 생각지도 못했다. 코파카바나에서의 무지개, 라파즈에서의 집밥 같은 한식. 

감격스러웠다. 코파카바나에서의 무지개는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여행이 잠시 슬럼프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이 모든 비바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나갈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봐야겠다. 다시 힘을 내야겠다. 

이 또한 모두 지나가리라지나가는 비처럼스쳐가는 바람처럼

내 인생의 무지개처럼 기적 같은 여행이 되리라, 다짐해본다.                                                                 

이전 19화 그저 완벽하지 않았을 뿐이야_ 페루 쿠스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