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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4. 2022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냐_페루 와라즈

 평소 등산이나 트래킹에는 하나도 관심 없지만 페루 와라즈에서는 꼭 트래킹을 하고 싶었다. 남미대륙을 다니면서 트래킹 할 기회도 많고 체력도 많이 필요해 한국에서 일부러 혼자 도보여행을 다녔었다. 그 다짐의 시작은 와라즈의 '69 호수'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꼭 체력을 길러서 이 멋진 호수를 보고 와야지’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멋진 풍경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이 치러야 하는지 이때는 알지 못했다. 

 드디어 페루 리마를 거쳐 와라즈로 향했다. 페루는 이상하게 어떤 도시를 가든 리마를 꼭 거쳐야만 했다. 와라즈는 에콰도르와 가까이에 있는 도시였지만, 에콰도르에서는 와라즈로 바로 갈 수 없었다. 리마를 거쳐야만 와라즈로 향할 수 있었다. 페루의 모든 길은 리마에서 통했다. 


 와라즈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차분한 마을이었다. 한 시간이면 마을을 다 둘러보는 데 충분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중국음식점이 유난히 많았는데 신기하게 산을 타고나면 기름진 중국음식이 최고인 것 같다. 

호스텔에 돌아와 조식을 먹는데 창문 너머로 멋진 설산이 보인다. 딱딱한 식빵에 턱이 아픈 것 같았는데 설산을 보니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다. 

  69호수 트래킹을 함께 하기로 한 동갑내기 친구와 나는 투어를 위해 택시를 한 대 섭외했고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아지자 우리는 시장에 내려 아침을 먹었다. 과일주스를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것이 특이했는데 은근히 괜찮은 방법이다.

호수로 가는 길이 너무 예뻐서 기사님은 우리를 몇 번이나 근사한 곳에 내려주었다. 설산도 너무 예쁘지만 호수 빛깔이 비현실적으로 고왔다. 몇 번의 호수가 더 있었지만 기사는 서둘러야 한다면서 산비탈을 한참을 올랐고 곧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늦어도 3시 반까지는 꼭 돌아와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는 굳게 약속을 하고 드디어 69호수를 보기 위해 서둘러 숲 속으로 향했다. 패기 넘치는 씩씩한 걸음으로.

 우리나라 산과는 달리 와라즈의 산은 높이는 높지만 넓은 들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능선으로 대체적으로 완만한 편이었다. 탁 트인 시야와 풀향기를 담은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에는 유유자적 풀을 뜯는 소떼들이 모여 있었는데 나만큼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다가 동화책 속에서 막 꺼낸 것 같은 작은 개울을 지났다. 신비한 나무와 은밀한 바위 사이에 숨어있는 그 개울 숲은 마치 요정들의 놀이터처럼 황홀했다. 한눈에 반해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동행이 시간이 없다며 재촉한다. 급한 마음에 딱 한번 셔터를 눌렀고 한 장뿐인 그 사진은 마치 그림엽서처럼 환상이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가는 길 곳곳에 노란 들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기 색만큼은 분명한, 주목받지 못하지만 비비 람에도 쉬이 꺾이지 않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는 그 강인함. 마치 나와 같아 보였다. 

들꽃을 친구 삼아, 멋진 풍경을 배경 삼아 걷다 보니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을 오르고 보니 이번에는 경사진 돌길이 나타났다. 두 어번 같은 구간이 반복됐을까.
점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뒤따르던 사람들은 하나 둘 우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우리를 지나치던 한 무리의 친구들이 고산병에 힘들어하던 우리에게 코카잎을 나눠주었다. 씹으면서 가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고 입에 물고 있으니 정말로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는 조금만 더 오르면 될 거라는 작은 위안의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최선을 다해 걷고 있는데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쩜 저들은 저렇게 걸음도 빠르고 체력도 좋을까? 나도 그들처럼 빨리 가고 싶은데 내 몸은 천근만근이다. 겨우 봉우리 하나를 넘어 드디어 평지가 나타났다. 이곳인가? 

하지만 아직도 산을 더 넘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좌절했다. 

3시간 코스라고 했는데 이미 3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호수는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아’라는 생각을 한 백만 번쯤 했을 때 69호수 정상에 다다랐다. 온몸이 땀범벅으로 녹초가 되었지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모든 고단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산 정상에서는 여전히 빙하가 녹아서 흐르고 있었고 호수는 푸르고 투명했다. 눈이 시리도록 영롱했다. 하염없이 앉아서 눈에 가득 담고 싶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극심한 허기에 비해 우리가 가지고 온 거라고는 감자와 삶은 달걀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택시기사와 약속한 시간은 3시 반인데 시간은 이미 1시가 넘었기 때문이다. 

사진도 대충 찍고 감자와 물을 양손에 들고는 우리는 날아가 듯이 내려왔다. 30분 정도 늦었지만 다행히 택시는 우리를 기다려주었고 긴장이 풀리자 미칠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타이레놀을 먹고 우리는 택시 안에서 기절해버렸다. 

내가 포기하고 싶을 땐 일행이, 일행이 포기하고 싶을 땐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투어를 마칠 수 있었다. 멋진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 투어는  평생 잊지 못할 비경과 고통을 함께 남겨주었다. 아름다운 사진 속에는 사실 엄청난 대가가 숨어있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포기하면 안 된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비경을 보러 쿠스코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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