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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4. 2022

긍정, 불운과 행운의 연결고리_페루 리마

 사실 페루 리마행은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원래는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만난 친구가 추천한 도시를 가려고 했으나, 버스시간이 애매해 바로 출발한다는 페루 리마행 버스에 무턱대고 오르고 말았다.

남미의 장거리 버스는 모두 2층 버스로 공항 시스템과 비슷한데 수화물을 보내고 체크인을 한 다음 정해진 좌석에 탑승한다. 승무원이 영어와 스페인어로 안내방송을 해준 다음 담요와 음료, 간식을 나눠주고 정해진 시간에 기내식처럼 식사도 나온다. 의자도 비행기 좌석과 똑같은데 훨씬 더 넓고 90도 가까이 젖힐 수 있어 생각보다 편하게 잘 수 있다.  

 멕시코, 과테말라, 에콰도르까지는 운 좋게 항상 동행도 있었고 에콰도르에서는 늘 케이티와 함께 였지만 이제부턴 완전히 혼자다. 벌써부터 케이티가 보고 싶다. 

입출국 시간까지 대략 40시간을 달려 늦은 밤 페루 리마에 도착했다. 아무런 계획도 정보도 없이. 당장 숙소부터 찾아야 하는데 핸드폰 배터리도 나가버렸다. 

노트북이라도 켜야 하나 멘붕에 빠져있는데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포르투갈 친구(조니 뎁을 닮았다)가 마침 합석을 제안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들이 묶은 호스텔은 매우 비싸고 호화스러웠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신없이 잠만 겨우 자고 일어나서 맞은 리마에서의 첫 아침. 멕시코시티에서의 첫날 아침과 묘하게 겹쳤다. 왠지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리마는 내가 상상했던 ‘열정’이 넘치는 가장 남미스러운 도시다. 리마에서 가장 부촌이라는 미라플로레스의 해변은 섹시한 서퍼들로 가득했다. 

칸쿤과는 다른 거칠고 터프한 바다다. 칸쿤을 실컷보고 난 후라 바다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거친 파도와 서퍼들의 에너지가 참 좋았다. 탁 트인 드넓은 수평선과 석양이 매우 멋있었다. 해변 뒤로는 호화스러운 호텔과 쇼핑몰이 가득했다.      


 어젯밤 묶은 호스텔이 너무 비싸서 미라플로레스에서 좀 떨어진 공원 근처로 숙소를 옮겼다. 2층의 숙소는 평범했지만 1층 레스토랑에서 먹는 조식은 훌륭했다. 이 숙소는 몇 년 전 ‘꽃보다 청춘 페루 편’ 에도 나와서 무척 반가웠는데 심지어 매니저도 같은 사람이었다.

숙소 앞 공원을 지나 구석구석 리마 거리를 걷고 있는데 대학생쯤 보이는 힙하게 차려입은 친구가 2ne1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다. 마트에서는 씨스타 노래가 흘러나오고 호스텔 티브이에서는 자막이 달린 한국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길거리 곳곳 한국 스타의 포스터는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냐고 묻는데 여기서는 단박에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본다. 한류는 거품이라는 기사를 본 거 같은데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유명한 호텔 앞을 지나는데 익숙한 한글이 보인다. 뭐지? 자세히 보니 JYJ 멤버들의 이름이 보인다. 3-40명쯤 되는 소녀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호텔 앞을 서성이고 있다. 

내가 한글을 알아보자 나를 붙잡고는 대뜸 JYJ가 페루 공연을 마치고 이 호텔에 묶고 있는데 호텔 프런트에 오빠들이 언제 나오는지 물어봐달란다. 

내가 한국 사람이긴 하지만, 영어도 스페인어도 잘 못하는 걸? 

소녀팬들의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가지만 부탁을 들어줄 순 없을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도 괜찮다며 한국사람을 만나 너무 반가우니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오빠들과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을 만나 기쁘다면서 JYJ 누구를 좋아하냐 묻는다. 플래카드에서 젤 먼저 눈에 띈 멤버 이름을 말했더니 소녀들이 꺄악거린다. (얘들아, 난 사실 엑소 팬이야…)     


 소녀들과 헤어지고 와라즈행 버스를 예매한 다음 분수쇼가 유명한 공원을 다녀왔다. 아직 해가 다 지진 않았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여행하면서 몇 가지 꼭 지키는 수칙이 있었다. 멕시코에서는 해가 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남미에서도 웬만하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택시를 타면서 지키는 수칙은 무조건 뒷좌석에 타고 창문을 꼭 닫는 것이었다. 

버릇처럼 뒷좌석을 타려고 보니 짐이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었다. 다른 택시를 탈까 했지만 유일하게 택시비를 흥정해줬고 급한 마음에 앞 좌석에 타버렸다. 운전시 가는 젊은 남자였는데 동양인 여자는 처음 본다며 자꾸 말을 걸었다. 한국을 좋아한다면서 자꾸 질문을 했다.  

한국의 날씨는 어떠냐,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면서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갑자기 솟구친 애국심에, 마침 키토에서 배운 스페인어에 자신감이 솟아 열심히 그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모르는 단어 하나를 찾으려고 핸드폰을 아주 잠깐 꺼냈다. 얼른 검색을 하고 가방에 넣으려고 손에 쥐고 있는 그 찰나, 갑자기 창밖에서 손이 하나 쑥 들어오더니 핸드폰을 낚아채갔다. 0.1초도 안 되는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다. 

바로 뛰쳐나가서 범인을 잡고 싶었지만 이미 내 몸에는 노트북이며 카메라며 무거운 귀중품이 많았고 리마는 생각보다 위험한 도시였다. 

너무 황당하고 무서워서 비명도 눈물도 안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사고가 멈춘 듯했다. 젊은 운전기사는 계속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조금씩 정신이 들자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뒷좌석이 어수선한 것부터 수상했다. 

남미에서는 택시 관련 범죄가 많아서 반드시 뒷좌석에 타라는 주의사항을 보고 늘 철칙으로 삼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앞 좌석에 타버렸던 것이다. 

정말 이상했던 것은 난 분명 앞 좌석에 타면서 창문이 닫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남미 택시는 낡은 차가 많아서 대부분 수동으로 창문을 여닫는데 그 택시는 자동이었다. 너무 더워서 창문을 1cm 정도만 남겨두고 분명 직접 닫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내가 연 것이 아니니까 분명 기사가 열었겠지. 언제 창문이 열렸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

게다가 그곳은 인도와 가까운 곳이 아니라 왕복 8차선 도로 위 한복판이었다. 교통체증으로 서행 중이었다지만 그 수많은 차 중에 어떻게 내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줄 알고 왔을까? 

더구나 내가 핸드폰을 꺼내 든 것은 30초도 안됐고 범행은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절대 우연히 일어난 범행일 수 없다. 기사가 끊임없이 질문을 해댄 것도 뒷좌석이 어수선한 것도 창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범인을 쫓겠다고 내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숙소 주인에게 들어보니 내가 스틸당한 갤럭시 핸드폰이 여기 페루인 평균 3개월치 월급이라 핸드폰을 노린 범죄가 제법 많단다. 또한 내가 사고를 당한 지역은 리마의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현지인도 위험해서 잘 가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숙소 주인이 대신 미안하다며 돕고 싶어 했지만 그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핸드폰이야 다시 사면된다지만 핸드폰 속 사진과 영상, 그리고 하루하루 기록한 일기가 너무너무 아깝고 속상했다. 또 당장 일행들과 연락할 방법도 사라졌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날 밤 속상한 마음과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핸드폰 도난(?) 사건을 여행자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런데 누군가 마침 며칠 뒤면 리마에 도착한다면서 흔쾌히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분은 한국에서도 몇 번 뵈었던 분이다. 

나는 남동생에게 처음으로 SOS를 보냈다. 동생은 빠르게 핸드폰을 구했고 인천공항까지 퀵으로 전달했다. 그분은(천사니까 미카엘이라고 불러드립니다) 인천공항에서 핸드폰을 전달받아 지구 반대편 리마로 오고 계셨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는 미카엘을 리마에서 만났고 무사히 핸드폰을 전달받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해서 뭐라도 보답을 해드리고 싶었다. 리마가 첫 도시라 하셨으니, 유명한 스폿을 골라 시티투어를 해드리기로 했다. 나머지 일정도 짜드리고 부족하지만 식사도 대접했다. 그 어떤 것으로 이 고마움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나는 늘 운이 없다"라며 비관해왔는데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비록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었지만 결국 좋은 사람들이 있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으니, 비극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꾸준히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다 좋을 수도 다 나쁘지도 않을, 불운과 행운의 연속.

그것이 여행이고 인생이지 않을까


그래서 인생은 생각보다 살만하고 재밌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누구든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 핸드폰만 덜렁 쥔 채 짐을 몽땅 도난당한 여행객도 있고 흉기로 협박당해 금품을 뺏거나 술에 취하게 만들어 이상한 가루를 먹이는 일도 있다. 그에 비해 내가 겪은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핸드폰 없이 여행하는 게 너무 불편할 줄 알았는데 핸드폰이 없던 와라즈에서의 며칠은 사실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은 머나먼 한국에서 핸드폰을 다시 받지 않았던가! 신기하게도 리마에서의 핸드폰 사건 이후로 위험한 일은 한 번도 겪지 않았다. 크게 액땜 한번 했다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덕분에 큰 용기가 생겨났다.

불운과 행운을 동시에 겪고 나니 나에게는 긍정이 남았다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비관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 좋은 일도 있겠지’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실망하면 좀 어때. 비관해도 우울한 건 마찬가지인데. 우울한 것보다는 실망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긍정, 그것은 불운과 행운의 연결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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