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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4. 2022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_에콰도르 키토

  내가 처음 이곳에서 케이티와 함께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이유는 아주 사소했다. 

 키토에서의 첫날 ‘적도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버스정류장이 너무 헷갈려서 몇 번이나 현지인들에게 물었지만 나는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여행객의 방문이 적은 에콰도르에서는 영어로 소통하기가 힘들었고 왠지 바디랭기지도 소용 없는 것 같다.

그들이 가르치는 손가락 방향을 몇 번이나 따라가 봤지만 역시나 적도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결국 주변을 샅샅이 뒤져 겨우 버스정류장을 찾았고 나는 허탈함에 웃음이 났다. 처음 내가 길을 묻던 곳에서 건물 한 개만 끼고 건너면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현지인들은 너무 친절하게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너무 자세히 가르쳐준 탓에 오히려 길을 헤맸던 것이다. 

단어 몇 개만 알아들었어도 1시간 동안 길을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그날 저녁은 아마조나스 광장(홍대처럼 번화가)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그런데 서브웨이는 단순히 샌드위치를 파는 게 아니라 내가 재료를 선택해야 한다. 종업원도 나도 영어가 서툴렀고 나는 손가락으로 대충 재료를 가리켰다.

 저녁을 먹고 이번에는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어섰다. 역시나 스페인어 메뉴판이다. 눈치껏 가장 저렴한 게 아메리카노일 거라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거품이 가득한 커피가 나왔다. ‘그래도 커피는 맞겠지’ 하고 한 모금 들이켰는데 아메리카노가 맞다! 심지어 너무너무 맛있었다. 그런데 과연 바디랭귀지로 얼마나 소통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케이티를 만났다. 우리가 만난 장소는 서브웨이였다. 나는 또다시 눈치게임을 준비 중이었는데 케이티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메뉴를 주문한다. 그 모습이 너무 경이로웠다. 그리고는 나의 주문까지 스페인어로 도와주었다. 제대로 주문한 샌드위치는 어제 내가 대충 주문한 것과는 다른 맛이었다. 순간 케이티가 존경스러웠다. 

이 사소한 사건으로 나는 케이티와 키토에서의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음 날 스페인어 학원을 등록했는데 10시부터 12시까지는 조아나, 2시부터 4시까지는 조나단에게 수업을 들었다. 둘의 수업스타일은 정반대였다. 조아나는 차분한 수학선생님 스타일이라면 조나단은 그림과 도구를 활용하는 미술 선생님 스타일이었다. 조아나에게 차분히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은 후 조나단과 신나게 오후 수업을 마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케이티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대부분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거나 서브웨이를 가는데 비슷비슷한 메뉴다 보니 며칠 전부터 짜장면과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었다. 

하루는 새로운 메뉴가 먹고 싶어서 현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갔다. 그런데 주방에서 웍을 돌리시던 사장님께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신다. 알고 보니 케이티와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사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식사를 만들어주셨고 근처 카페를 데려가셨다. 그런데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돈을 내지 않으셔서 여쭤보니 다 사장님 건물이라 공짜란다. 건물주로 성공한 분을 여기서 뵙다니. 

다음 날은 짜장면을 만들어줄 테니 집으로 놀러 오라며 초대를 해주셨다. 이럴 수가! 며칠 전부터 그렇게 먹고 싶다던 짜장면을 실제로 영접하게 될 줄이야! 나는 건더기가 면보다 많은 짜장면은 처음 먹어봤다. 우리는 소원을 하나 이룬 듯이 기뻤다.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후안 발데즈(남미에서는 스타벅스보다 유명한 커피 체인점)에서 숙제를 하거나 카롤리나 공원을 간다. 후안 발데즈는 점심시간에도 자주 가는 곳이라 직원들하고도 제법 친했는데 이젠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메뉴를 내어 줄 정도다. 

스페인어 실력이 늘어갈수록 그들과의 대화도 점점 늘었다. 특히 호세라는 직원과 친했는데 내가 카페에 들어서면 쉬다가도 나와서 내 주문을 받아주었다. 제법 어려 보여서 20대 초반인 줄 알았는데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란다. 

그는 내가 스페인어를 배우는 게 신기하다며 숙제도 여러 번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은 신문기사를 하나 보여줬는데 남미에 진출한 한국의 OO자동차 광고기사였다. 호세는 평소 차에 관심이 많고 남미에는 한국산 자동차가 제일 많다며, 언젠가는 제일 비싼 한국산 자동차를 살 것이라고 했다. 호세는 나에게 한국에 대해 물었다. 한국의 면적과 한국의 인구를 말해주니 호세는 믿을 수 없어했다. 숨 막혀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나. 

어느 날은 한글을 알려주며 호세의 이름을 한글로 써주니 글자가 기호처럼 귀엽게 생겼다며 기뻐했다. 

호세는 조심스레 제일 궁금했던 거라며 나에게 ‘한국에서 너는 얼마나 부자냐’라고 물었다. 먼 나라를 여행할 수 있을 정도면 내가 아주 부자일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상중하로 치면 나는 우리나라에서 하층민이고 이 여행을 위해서 1년도 넘게 꼬박 모아야 했다고. 

그러자 호세는 매우 슬픈 얼굴로 

“그래도 너는 여행할 수 있잖아, 난 10년을 꼬박 일했지만 한 번도 에콰도르를 벗어난 적이 없어. 심지어 바로 옆 나라조차 가보지 못했다고. 1년만 일해도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넌 행운아인 거야. 너의 나라에서는 하층민이라지만 우리에겐 넌 아주 부자야. 그렇다면 적어도 넌 너의 나라에 감사해야 해”      

듣고 보니 호세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의 말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주었다.

호세의 말대로 나는 매우 좋은 나라에서 태어난 용감하고 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의 여행이, 나의 나라가,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소중하게 보내기로 다짐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케이티와 나는 주말에 코타카치 투어를 하기로 했다. 백두산 천지처럼 큰 천지안에 두 개의 섬을 보트를 타고 둘러보는 투어였다. 마침 날씨도 끝내줬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가사라 딱 떠오를 만큼 보트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림 같았다. 부드럽게 뻗은 넓은 산 능선을 따라 트래킹을 해도 굉장할 것 같았다. 

이곳은 활화산이라 지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포가 킬링 포인트다. 그래서 칠성사이다 광고에 나오는 탄산처럼 뽀글뽀글 거리는 기포를 상상했는데 현실은 자세히 보아야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평일 내내 열심히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투어라도 해주니 뭔가 활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다음 주에 우리는 코토팍시 투어를 떠났다. 

이곳 역시 활화산으로 정상에는  만년설이 쌓여있는 꽤 높은 산으로 제법 추운 곳이다. 마침 비까지 내려서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고산병에 좋다는 코카 차를 잔뜩 마셨다. 녹차와 맛이 비슷했다. 코카 캔디도 있어 몇 개 먹으려고 했더니 5개에 2달러란다. 너무 비싸서 돌아서는데 가이드에게는 한 움큼 공짜로 준다. 가이드는 나와 케이티에게만 슬쩍 캔디를 쥐어주었다. 

코토팍시에서 탈 자전거를 싣고 버스는 산 중턱에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직접 산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코카 차를 너무 많이 마신 데다가 날도 추워서 다들 화장실이 급했다. 나 역시 못 참을 지경이었다. 화장실은 1시간은 더 올라가야 한다는 말에 다들 큰 바위를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차량 옆에서 해결하기도 했다. 나 역시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국외 첫 ‘노상방뇨’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산에 오르기로 했다. 코토팍시는 화산재 흙이라서 눈이나 비가 와도 질퍽거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얼마나 올랐을까? 고산지대라 그런지 금방 숨이 찼고 머리까지 아파 와 중간에 하산해야 했다. 돌아가는 길은 투어버스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자전거 안장은 다 젖어있고 헬멧은 잘 안 맞았지만, 그렇다고 안 타면 왠지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아 일단 탈 수 있을 만큼 타보기로 했다. 하지만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너무 시려서 핸들을 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아직 얼마 내려오지도 못했는데. 

다른 일행 몇몇은 손이 너무 시려 안 되겠다며 포기하고 버스에 올랐다. 나는 좀 더 참아보기로 하고 있는 힘껏 입김으로 손을 녹이고 온 몸에 힘을 빼고는 한 번에 쭈욱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몇 번을 달렸더니 몸이 좀 풀리면서 컨디션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달리다 보니 브레이크 잡는 요령도 생기고 속도를 높여가며 달리는 게 재밌었다. 처음엔 자전거에만 집중해서 몰랐는데 멈춰서 보니 코토팍시의 풍경이 너무나 멋있다. 

처음 보는 만년설도 너무 신기하고 높은 산 중턱인데도 드넓은 초원 같은 풍경이 심하게 표현하자면 세렝게티 같다.(말도 안되겠지만) 내셔널지오그래픽 생중계를 보는 것 같다. 

자전거 일행들과 말은 통하지 않지만 우리는 서로서로 기다려주면서 끝까지 함께 내려왔다. 내려오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고 뿌듯했다.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한 경험이라 해보길 너무 잘한 것 같았다. 


일상 속에서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일상이었고, 우리의 일상은 곧 여행이었다.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조아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한글은 모음과 자음만 알면 어떤 단어든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자 조아나는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한글의 모음과 자음을 스페인어에 비유해 설명해주었더니 바로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썼다. 역시 한글은 위대하다. 

나는 많은 친구들에게 한글을 알려주고 한글로 이름을 써줬는데 매번 “아”에는 왜 ㅇ을 써야 하는지, 마르코의 R은 왜 ‘으’를 써야 하는지 설명하는데 상당히 애먹었다. 

하지만 조아나는 ㅇ과 ㅡ를 묻지 않은 유일한 남미 사람이었다. 조아나는 천재임에 분명하다.

그날 오후 조나단에게도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조나단은 한글에 큰 흥미를 느끼진 않았지만 대신 우리를 핫한 바에 데려갔다. 노래방도 있고 다트도 있는 최신식 바라고 했다. 

노래방은 익숙한 한국의 기계였지만 사용법은 전혀 달랐다. 원하는 노래의 번호를 카운터에 적고 결제를 하면 노래를 틀어주는 방식이다. 아는 노래도 없고 비싼 것 같아서 우리는 맥주만 마셨다. 아쉬움에 케이티와 둘이서 아마조나스의 펍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사람도 많고 분위기도 좋은데 자리가 없었다. 종업원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데 마침 큰 소파가 눈에 들어왔고 우리는 여기에 앉겠다고 했다. 종업원은 엄지를 내밀며 윙크를 해주었고 맥주와 함께 나온 2달러짜리 감자튀김은 양이 어마어마했다. 

케이티와 나는 양반다리로 마주 앉아 맥주잔을 들고 '짠'을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들도 우리에게 잔을 흔들며 '짠'을 외쳐주었다.


 오늘은 후안 발데즈의 호세가 마지막 출근이라고 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그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기념으로 주었다. 그는 이걸로 커피 한잔은 마실 수 있냐고 물었고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그는 실망했다. 그런 호세에게 나도 서운했다. 

호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는 카롤리나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카롤리나 친구들이 있다. 

그중에 가장 성격이 밝은 콜리가 내 옆으로 다가와선 감자를 열심히 조각한다. 뭐하냐는 거냐고 물으니 이걸로 마리화나를 피울 거란다. 감자를 담뱃대처럼 깎더니 마리화나를 서로 돌아가면서 피운다. 남미에서 많이 보던 일상이라 이제는 충격도 아니다. 

언제나처럼 나에게도 권하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거절한다. 

나는 내 부모처럼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다. 그 모습이 나에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박혀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담배연기를 하도 마셔서 그런가, 기관지도 좋지 않다. 담배는 평생 멀리하고 싶다.

 하루는 콜리가 이건 남미의 흔한 문화이자 의리라며 우정을 생각해서 한 번은 피워야 한다고 나를 회유했다. 담배를 필 줄 모르는 나는 겉치레로 그냥 연기만 들이마시고 바로 뱉었다. 친구들이 심하게 눈치를 줄 때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모면했는데 하루는 술을 마시러 다 같이 싸구려 펍에 모였다. 그날도 친구들은 우정이라며 돌아가면서 마리화나를 피워댔다. 

내가 몇 번을 거절하자 한 친구가 넌 한 번만 피우면 된다며 나에게 마리화나를 쥐어줬다. 알겠다며 평소처럼 마리화나를 피우는데 그날따라 연기가 제대로 폐 속으로 직행했다. 잠깐 숨이 막힐 듯했지만 이내 괜찮아져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30분쯤 흘렀을까. 갑자기 어질어질하더니 눈앞의 케이티가 뭉크의 절규처럼 흐트러져 보였다. 세상이 찌그러질 것 같이 빙글거리더니 참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케이티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급하게 숙소로 돌아와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더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생각이 든 것도 아닌데 그냥 갑자기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실실 웃고 있었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 날고 있었고 몸이 둥둥 뜨더니 어느새 천장만큼 높이 올라갔다. 천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내가 보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나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분명 천장을 유유히 날고 있었다. 

마침 내가 걱정된 케이티는 숙소로 돌아왔고 침대 위에서 발과 팔을 허공에 휘두르고 있는 기괴한 나를 발견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까르르 소리까지 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나는 목이 타는 듯 아팠고 그날 이후로 절대 마리화나에 입도 대지 않았다. 


 케이티와 내가 키토를 떠나는 날 우리는 미리 허락을 받아 카롤리나 친구들을 숙소에 초대했다. 우리는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감자전과 닭볶음탕을 준비했다. 감자를 갈아서 간단하게 감자전 만드는 법을 보여주니 너무 신기해했다. (몇 개월 뒤 페이스북으로 직접 감자전을 만들었다는 후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국적불문 가성비 높고 만족도 높은 한식은 무조건 감자전이다. 감자전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지.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지.

닭볶음탕은 맵지 않게 만들었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이 먹는 것처럼 맵게 먹고 싶다고 해서 매운맛을 좀 보여주었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간에는 사실 너희들 평소에 감자, 당근 깎아서 피는 거 정말 별로였다고 하면서 오타발로 시장에서 구매한 예쁜 담뱃대를 선물로 주었다. 

이제 조각 행위 그만하라고 너희들 조각에 소질도 없는 것 같다고 하니 다들 웃었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이 우리의 일상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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