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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4. 2022

불장난 같았던 서른 살의 마지막_에콰도르

  키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라 하면 단연코 ‘카롤리나 공원’이다. 

학원에서 멀지 않은 이 공원은 키토 중심부에 위치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원이다. 근처에 대형 백화점과 큰 도로가 있어 접근성이 매우 좋고 공원시설도 훌륭해서 많은 키토 시민들이 이곳을 찾는다. 뉴욕에서도 유학을 했다는 케이티는 ‘센트럴파크’ 보다 좋은 것 같다며 칭찬하기도 했다.(나 역시 훗 날 센트럴파크를 방문하게 된다) 

이 공원의 매력에 흠뻑 빠져 햇살 좋은 날은 무조건 공원으로 향했다. 키토의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스럽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순간을 절대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 

잔디밭에 누워 숙제를 하거나, 산책을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가장 흥미로운 장소는 ‘스케이트 파크’였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곳인 데다 역동적인 스케이드 보드에 이끌려 그곳에 자주 머물렀다. 

그 공원에 동양인은 우리뿐이라 꽤나 눈에 띄었는지 지나가는 현지인들마다 인사를 건넸다. 한참 스페인어에 자신감이 올라있던 나는 일일이 인사를 다 받아주었다. 

동선이 늘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레 보드와 자전거를 타는 친구들과 가까워졌고 누구 한 명이라도 하루라도 안 보이면 걱정이 될 정도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갑자기 삭발을 하고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밝고 순수한 청년 콜리, 강한 승부욕을 가졌지만 영화배우 뺨치는 눈웃음을 가진 미소년 카를로스, 책임감 강한 맏형이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위험한 남자 마르코, 할리우드 배우보다 잘생긴 외모로 나를 설레게 한 신비주의 파울, 속을 알 수 없다가도 츤데레처럼 우리를 챙겨주던 앙헬. 하나같이 착하고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이었다. 특히 파울은 내가 몰래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롤리나 친구들이 우리를 홈파티에 초대했다. 여행 중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가 바로 현지인의 홈파티에 가보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을 이룬 것이다. 

기대 가득했던 홈파티는 ‘여기가 바로 남미구나’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다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일단 흥겨운 음악과 골반춤으로 나를 반겼다. 나도 골반으로 응수하고 싶었지만 몸치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단 분위기 파악부터 하는 척했다. 남미 친구들은 흥이 다 골반에 몰려 있나 보다. 남녀 할 것 없이 다들 유연하고 역동적인 골반을 가졌다. 

매우 예의 바르던 명문대 모범생 친구조차 라틴음악이 나오자 특유의 골반 바운스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나도 꽤 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소심한 골반을 가진 애송이에 불과했다. 이런 내가 답답했는지 아까 그 모범생 친구가 나에게 골반춤을 가르쳐 주겠다며 나섰다. 난 그녀처럼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단 한 번도 역동적인 골반을 보여주지 못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난 정말 그게 최선의 최선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친구들이 파울과 나를 무대 중앙으로 밀어 넣고는 환호를 보냈다. 

이런... 내가 저 녀석을 흠모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니. 순간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디라도 숨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친구들은 용기를 내라며 나를 응원했다. 

긴장해서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던 그 순간 난 자기 최면을 걸었다. 

단지 이건 춤일 뿐이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뭐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쿨하게 있는 힘껏 골반을 튕겨줬다. 섹시해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사실은 엉망진창 막춤을 추고 있는 나를 파울은 부드럽게 리드했다. 남자와 함께 춤을 춰보는 건 난생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순간순간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의 눈동자 색이 너무 예쁘고 특이했다. 짙은 녹색과 밝은 갈색이 반반 뒤섞여있는 굉장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황홀한 눈도 처음이었다. 나는 어느새 골반 바운스도 잊은 채 그의 눈동자에 빠져 그의 리듬에 젖어들었다. 

여행 내내 바라고 바라던 로맨스는 이곳 에콰도르에서도 끝끝내 이룰 수 없었지만 파울과의 짧지만 강렬했던 그 순간만큼은 가장 설렜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의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다. 


 며칠 후 12월 31일. 서른 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내가 ‘오늘이 마지막 서른 살’이라고  하자 케이티가 깜짝 놀랐다.      

“어머! 나는 언니가 당연히 20대인 줄 알았어~”     

센스 있는 케이티는 새해 덕담을 미리 해준다. 말이라도 너무 고맙다. 내 입은 이미 귀에 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생일부터 크리스마스, 연말까지 의미 있는 날을 모두 해외에서 보낸다. 새해도 해외에서 맞는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케이티와 나는 며칠 전에 만났던 한국인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오전에 케이블카를 타고 키토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키토 시내는 며칠 전 바실리카 성당에서 본 풍경과는 또 달랐다. 빌딩 하나 없이 도시 전체는 주황색 지붕으로 빼곡했다.     

택시를 타고 아마조나스 광장으로 향하는데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 그런데 차가 많아서 막히는 것이 아니라 수상한 정체(??)들이 차를 막아서고 있다!!! (과하게) 여장을 한 남자들이, 지나가는 차들을 세우고는 여자처럼 춤을 춘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지 무슨 상황인지 감도 오지 않는데 운전기사는 익숙한 듯 그들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그들은 이상한 쇼(?)를 멈추고 길을 내어준다. 과부가 된 여자들을 기리기 위한 문화라는데, 현지인의 농담으로는 게이들에게는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고 한다.      

 에콰도르는 12월 31일이 되면 저마다 화려한 코스튬 분장을 하거나 특이한 가면을 쓰는데 대부분 기괴하거나 웃긴 모습을 한다. (우리는 수시로 색이 변하는 나름 최신식 LED 안경을 썼다)      

그리고 하나같이 커다란 인형을 가지고 거리로 나오는데 대부분 집에서 직접 만든다고 한다. 허수아비처럼 사람과 흡사하게 생겼는데 실제 사람처럼 옷도 입히고 화장도 해준다. 크기도 사람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크다.     

낮 동안 집 앞이나 거리 곳곳에 인형을 세워두고 한 해 동안 있었던 액운을 모았다가 밤이 되면 인형에 불을 붙여 액운을 없애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밤에는 “불쇼”를 한다는 거다. 불쇼!      

역시나 밤이 되니 거리 전체가 불기둥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큰 인형을 켜켜이 쌓아두고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기둥이 치솟았다. 거리 곳곳에는 불기둥으로 가득했고 광장은 사람들의 환호와 열기로 후끈거렸다. 제대로 연말의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기둥이 치솟는 인형 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뛰어넘기 시작했다. 편도도 아닌 왕복으로! 그 모습이 마치 불길 속으로 사람이 뛰어드는 것처럼 무섭고 위험해 보였다. 한 남자가 여자 친구를 안고 불기둥 위를 점프할 때는 정말로 불이 붙을 것 같았다. 불이 붙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너무 놀라서 ‘오 마이 갓’을 외치는데 옆에 있는 현지인이 내 손을 잡고 같이 뛰어넘잖다!      

“오. 마이. 갓. 난 못해!” (난 세상 쫄보야~)     

그는 불길 속을 뛰어넘어야 올해 안 좋았던 액운을 태우는 거라고 했다. 액운을 태워야 새로운 새해를 맞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불길이 사라지기 전에 뛰어넘어야 한다고 했다. 불길이 거셀수록 액운이 더 잘 탄다나? 난 그의 말에 설득당할 뻔했다. 아니 이미 설득이 되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는 사람들을 따라 불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나도 왕복으로 달려주었다. 한참 흥이 오르는 순간 폭죽이 터지면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서른 살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불장난처럼 짧고 강렬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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