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늘 열린 결말이다
원래 에콰도르에서 오래 머물 계획은 아니었다. 딱히 흥미로운 유적지가 있는 곳도 아니고 중미에서 시간을 꽤 지체해버렸기에, 수도인 키토에서 가장 유명한 적도 박물관이나 둘러보고 액티비티가 유명하다는 바뇨스에서 들렀다가 3-4일 안으로 에콰도르를 떠날 생각이었다. 적도 박물관을 다녀와서 버스 티켓을 사러 갈 때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버스표를 예매하지 않고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 떠나고 싶은 도시가 생기면 그리로 가지 뭐’
이 한 번의 즉흥적인 선택이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올 거란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적도 박물관은 흥미로운 곳이 분명했다. 적도에서만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데 물이 흐르는 방향이라던가 팔을 벌려 균형을 잡는 일상 속의 일들이 적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못 위에 계란 세우기’는 놀라웠다. 정말 가능할까? 도전자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런데 나. 만. 빼. 고 주변의 한국인들은 모두 성공하는 것이었다. 질 수 없지. 우주의 모든 집중력까지 끌어 모은 나는 기어코 못 위에 계란 세우기에 성공했다. 난 의지의 한국인이다.
뒤이어 유네스코에 등재된 키토의 구시가지를 돌아봤다. 지도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바실리카 성당에 앞에 멈췄다. 규모는 멕시코의 대성당이 더 크지만 외관은 바실리카가 더 특이하고 예뻐 보여 마음이 갔다.
2달러를 내면 첨탑 투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왜 멕시코 대성당에서는 생각을 못했지? 재밌을 것 같아서 바로 신청하고 계단을 오르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경사가 80도는 되는 것 같다. 안전장치? 그런 거 없다. 그냥 오른다! 정말 아찔하다. 놀이기구도 못 타는 천하의 쫄보인 나에게는 세상 무서운 도전이다. 여기서도 죽네 사네 할 순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갔다. 소박한 듯 아름다운 키토의 구시가지 풍경이 파노라마 뷰처럼 채워져 있다.
저 멀리 솟은 언덕 위로는 마리아상이 성스럽게 빛나고 있다. 바실리카의 두 첨탑 사이로 저 멀리 마리아상이 비치는 모습이 최고의 사진 스폿이었다.
이제 점점 해가 저물고 있다.
키토에서의 마지막 밤, 떠날 준비를 완벽히 마치고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키토에 사는 한국인들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장기 배낭여행자, 파견근무 중인 직장인, 유학생, 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이유로 키토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들을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중에서 케이티라는 친구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남미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꿈도 많고 재능도 흥도 많은 유쾌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스페인어와 영어가 너무 유창해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부러웠다. 여행하는 내내 언어의 불편함을 몸소 느끼고 있던 터라 케이티의 유창한 언어 실력은 나를 자극했고 큰 동기부여가 됐다. 그 길로 나는 짐을 풀고 케이티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전혀 계획에도 없던 <케이티와 한 달 동안 동거하며 스페인어 배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강한 이끌림에 나도 모르게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케이티라는 친구의 밝은 에너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조용한 듯 강렬한 남미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이 도시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유학생활에 대한 동경도 좀 있었는데 비록 한 달이지만 공부하며 여행이라니, 꽤 근사할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오늘 버스 티켓을 미리 끊었더라면 어땠을까? 난 선택의 여지없이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추억과 우정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는 것인지 짐작도 못한 채, 무미건조한 여행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모험이라는 게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처럼 꼭 거창할 필욘 없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질러버린 그 선택은 충분히 내 인생에서 해볼 만한 ‘모험’이었다. 모험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설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함부로 결말을 예측할 수 없을 테니까.
다음 날 당장 <케이티와 동거하며 스페인어 배우기>를 시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같이 살 집을 빌렸다. 우리는 저렴하고 조용한 곳으로 조식 포함 하루 9불짜리 4인실 룸으로 정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동이었지만 북적거리는 호스텔은 아니라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최소 3주는 머물 계획이라, 처음 예상했던 여행 일정보다 늘어나 아웃 티켓 일자도 여유롭게 변경했다.
마지막으로 케이티가 다니는 스페인어 학원을 등록했다. 하루 4시간씩 주 5회 일대일 수업이고 수업료는 1일 5불이었다. 케이티와는 수업 레벨도 다르고 선생님도 달랐지만 수업시간을 똑같이 맞춰서 늘 함께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에서 주는 조식을 먹고 느긋하게 학원으로 갔다. 시간이 남으면 매일 가는 단골 카페에 들렀다. 이 단골 카페는 커피 한잔에 1달러 정도였는데 커피 맛도 좋았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무엇보다 햇살 좋은 날 야외테이블에 앉으면 끝내주게 기분이 좋았다.
매일 학원을 가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키토에서의 일상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인데 지루하지 않았다. 가끔 펍에서 맥주를 실컷 마시고 어쩌다 클럽에서 신나게 놀아도 하루 생활비가 2-3만 원 남짓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절제했고 성실한 학생처럼 지내려 노력했다. 나는 유학생처럼 보낼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해 최대한 유학생처럼 생활하고 싶었다. 서른 살의 만학도라도 된 듯이 마냥 즐겨보고 싶었다.
어느덧 3주간의 스페인어 스터디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숫자, 방향, 인사 등 기본적인 스페인어 대화가 가능했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길을 물어 찾아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앞으로 남은 여행에 강한 자신감이 생겼다.
아직도 키토는 단순히 여행지가 아닌, 내가 살았던 동네 같은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의 한 달은 남미 여행의 터닝포인트였다. 스페인어를 못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놓치고 말았을 추억을 많이 담았기 때문이다.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좀 더 웃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로울 수 있었기에 나의 여행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이게 다 케이티 덕분이고 즉흥적인 선택에 대한 긍정적인 나비효과다.
살면서 가끔은 즉흥적으로, 느껴지는 대로 행동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래도 되나?' 대부분 망설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일탈을 하고, 즉흥적인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생각보다 세상은 관대하고 넓다. 또한 서운할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가끔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질러보자.
이왕 할 거라면 아주 쿨하게 즐겨보길 바란다. 당신은 평소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테니 충분히 즐길 자격이 있다.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작은 일탈부터, 평소 하고 싶었던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쩌면 가끔은 앞 뒤 계산하지 않고 일단 저질러보는 무모함은 대단히 용기 있는 도전일 수 있다.
그 누구도 결말을 함부로 예측할 수 없으니까! 언제나 늘 열린 결말일 테니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 같지만 사실은 작은 일탈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저 그냥 마음의 소리를 따르면 된다.
그 선택이 가져올 나비효과를 기대하는 그 설렘은, 열린 결말을 그려보는 그 떨림은..
어쩌면 팍팍한 인생을 짊어진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월요일에 로또를 사두고 일주일 내내 1등 당첨을 기대하는 것처럼. 인생은 언제나 열린 결말이다.
하지만 너의 하루 그리고 너의 일주일 그 뒤의 한 달.. 당신의 시간은 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끔의 일탈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