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에서의 일정이 차분하고 진지했다면 칸쿤은 정반대였다. 화려함 그 자체다. 모든 시선을 압도하는 칸쿤의 바다는 파도소리부터 역동적이었고 글로만 보고 말로만 들었던 ‘에메랄드’ 바다는 참말이었다.
‘파스텔톤 바다’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말도 안 되게 예쁜 바다와 하늘을 보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온몸의 흥이 끓어오르다 못해 없던 흥도 되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다는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그곳에서는 걸어서 1분이면 카리브 해변에 닿을 수 있었고 5분 거리에 월마트도 가까이에 있어 완벽한 숙소였다. 10인용 도미토리지만 매우 넓어서 지낼만했다. 무엇보다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바다 앞에서는 그 어떤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주저 없이 바로 해변으로 향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말도 안 되는 풍경이었다. 모래가 너무 고와서 마치 밀가루를 수백 번 치댄 것처럼 부드럽고 살살거렸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모호했고 온 세상이 푸른색과 파란색의 그러데이션으로 그려진 수채화 같았다.
마침 100페소면 썬베드를 빌릴 수 있다고 했다. 모히또 한잔에 생수 한 병을 주문하면 딱 100페소였는데 한화로 약 9천 원 정도였다. 나이대 상관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화려한 비키니와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멋져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인데.
수영은 못하지만 거센 파도를 타며 실컷 물놀이를 하고 썬 베드로 돌아와 누웠다.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처음 보는 색이었다. 분명 내가 아는 그 푸른 하늘이 맞는데. 눈이 감길 듯 말 듯 나른하던 찰나 하늘 위로 신기할 정도로 큰 새들이 지나갔다. 살면서 그렇게 큰 새는 본 적이 없어 깜짝 놀랐는데 멕시코에서는 흔하디 흔한 펠리컨이란다.
수영하느라 옷이 다 젖었지만 1분이면 숙소에 도착하니 문제없다. 샤워를 마치고 월마트로 향했다. 월마트에서는 한국 라면을 약 600원에 살 수 있고 과일은 천 원어 치면 충분하다.
오늘은 한국인 일행들끼리 모여 저녁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그날 저녁 당번은 나였고 메뉴는 불고기. 그런데 오늘따라 고기 양념이 영 맛이 없었다. 야채도 듬뿍 넣고 설탕도 넣어봤지만 이상하게 짜고 맛이 없었다. 아마도 오늘 마트에서 사 온 간장이 우리나라 간장과 다른 모양이다. 한 시간 넘게 정성스레 만들었는데 속이 상했다. 누군가 ‘이 맛은 짠한 맛’이라고 표현했고 그 말에 또 다른 친구는 오늘 다들 바닷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짠한 거라고 음식에 들어간 정성은 문제가 없다며 훈훈하게 마무리해주었다. 다들 정이 넘치는 나이스 한 친구들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한 친구가 티셔츠에 “yo soy coreano”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등 뒤에 커다랗게 문구를 쓰고 싶단다. 꼭 이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의 바람대로 문구를 완성한 후에 우리는 해변으로 향했고 오늘은 마가리타 한잔으로 썬베드를 빌렸다.
점심으로는 현지인이 추천한 타코 맛집으로 향했다. 타코집 주인은 스페인어로 한국인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보고 너무 좋아했다. 그 티셔츠를 본 현지인 모두 반응이 뜨거웠는데 아마 이 친구의 큰 그림이었으리라. 그는 마치 연예인 같았다. 주인은 기분이 좋다며 서비스로 콜라를 줬다. 멕시코 콜라는 왜 더 맛있는지 신기한 일이다. (실제로 원료 차이 때문에 멕시코 콜라의 당도가 더 높고 부드럽다고 한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칸쿤의 밤은 무척이나 밝고 화려했고 무엇보다 안전했다. 달러와 영어가 더 흔해서 언뜻 미국의 휴양도시 같기도 하다. 낮에는 바닷가에서 밤에는 관광지와도 같은 길거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영화 마스크에 나왔다는 클럽 코코 봉고는 결국 가보지 못했다.
다음날은 봉고를 타고 스노클링의 성지라는 ‘아쿠말’ 해변으로 향했다. 아쿠말은 특이한 지형으로 인해 바다거북이 대거 출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정말로 바닷속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다거북이 가득했다. 바다거북에 기생하는 물고기조차도 성인 남성 팔뚝보다 컸다. 바다거북은 가까이에서 보니 내 방 침대보다도 크고 소형차와 맞먹는 덩치다. 나는 거북들과 함께 스노클링을 했다. 거북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고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그다음 날은 쉘하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자연친화적 워터파크 같은 곳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되며 약 6만 원의 입장료에는 모든 음식과 주류가 포함된 금액이라 잘만 이용하면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기에, 한국인에겐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제대로 뽕을 뽑고 놀았다. 오픈하자마자 배 터지게 먹고 스노클링 하고. 다시 간식 먹고 스노클링 하다가 점심도 배 터지게 먹고 이번에는 튜빙과 다이빙을 한다. 자전거를 타고 숲을 산책하다가 간식을 먹고 다시 물놀이를 하다가 저녁을 먹고 6시 직전에 퇴장. 생각보다 물놀이는 상당히 지치는 일이다.
칸쿤에는 흔히 허니문 여행으로 많이 찾는 호텔존 말고도 주변에는 멋있는 곳이 너무 많다. 다 보려면 한 달은 걸릴 것 같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신의 도시 ‘치첸잇샤’는 피마리드 앞에서 박수를 치면 꼭대기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 고도화된 고대 문명과 잔인한 그들만의 문화를 모두 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칸쿤에서 배를 타고 나가면 '이슬라 무헤레스'라는 섬이 있는데 이곳은 자전거나 골프카로 이동하면서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동쪽과 서쪽의 분위기가 완전 다르고 석양이 너무 멋있어서 하루 종일 둘러봐야 한다.
호수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천연동굴 '세뇨떼'도 환상이다. 거대한 싱크홀 속의 수중도시에 잠입한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주로 머물렀던 곳은 저렴한 숙소가 많은 플라야 델 카르멘으로 배낭여행객들은 대부분 이곳에 머문다. 칸쿤의 호텔존과 크게 다르지 않고 가성비가 매우 뛰어나며 다른 해변과 관광지로 이동하기에 더 편하다.
한 번은 호텔존이 너무 가고 싶어서 일행들과 함께 무작정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각 호텔마다 투숙객이 아니면 바다를 볼 수 조차 없어 너무 실망스러웠다. 호텔에 둘러싸여 바다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일단 예약하러 왔다 하고 호텔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한창 형광색의 팔찌가 유행이라 다들 하나씩 하고 있었는데 그 팔찌가 호텔 출입증과 비슷했나 보다. 종업원이 팔찌를 쓱 보더니 우리를 자연스레 해변으로 안내했다. 친절하게 샤워부스까지 안내해줬다. 신기한 일이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이곳의 바다가 더욱 예뻤다는 것이다. 플라야 델 카르멘의 바다색에 필터를 한번 더 입혀놓은 듯했다. 넋을 놓고 그대로 바다로 돌진했다. 양심에 찔렸지만 우린 의도적이지 않았다며 애써 합리와 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되돌리기엔 이미 바다에 흠뻑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일탈은 운 좋게 성공했다.
그러나 칸쿤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실망스러웠다.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도로는 너무도 한산했다. 문 연 식당조차 찾기 어려워 내내 버거킹에서 끼니를 때워야 했고 커피조차 버거킹에서 해결해야 했다. 저녁에는 페스티벌 비슷한 분위기가 났지만 마이클 잭슨과 미국 디즈니랜드 코스프레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호텔존이 아니면 바다도 보이지 않아 칸쿤이라는 실감이 하나도 나지 않았고 조금만 나서면 바다가 보이는 플라야 델 카르멘이 너무 그리웠다.
칸쿤에서 1시간 거리인 쿠바도 포기하고 이곳에서 한 달 가까이 지체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함께 어울렸던 한국인 여행자들도 각자의 이유로 칸쿤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여행자들끼리 모여 소소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월마트에서 테킬라와 맥주를 한 상자씩 사들고 카리브 해변으로 향했다. 주변은 온갖 네온사인으로 가득한데 해변가는 처량하도록 어둡고 고요하다. 파도소리만 가득한 칸쿤의 해변가에는 오직 우리 일행들 뿐이었다. 우리는 사 가지고 온 술과 안주로 마치 부산 앞바다에 온 것 마냥 자유롭게 파티를 즐겼다. 앞으로의 기대감과 이별에 대한 아쉬움에 한참 대화가 오가던 때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살짝 취기가 올라 술도 깰 겸 혼자 해변을 거닐다 환하게 바다를 비추는 달빛 아래서 발길을 멈췄다. 마침 오늘은 full moon이었다.
기분 탓인가? 서울에서 보던 달보다 훨씬 크고 밝아 보인다. 유난히 아름답고 영롱한 그 보름달 아래서 수영을 즐기는 커플이 비쳐 보였다. 반짝거리는 은색 달빛에 비추는 실루엣만으로도 상당히 로맨틱해 보였다. 마치 로맨스 영화의 포스터처럼 그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남자는 왠지 디카프리오를 닮았을 것만 같다.
마침 내 옆을 지나던 일행도 그 커플을 봤는지 한국에 있는 여자 친구와 꼭 다시 와야겠다며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달빛에 비치는 바다가 너무 이뻐서, 그 로맨틱한 커플이 너무 부러워서, 여자 친구와 함께 오고 싶다는 그 친구가 또 너무 부러워서, 그리고 난 솔로라는 생각에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수영하던 커플이 갑자기 물 위로 올라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친구에게 라이터를 빌릴 수 있냐고 물었고 우리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먹은 것인가, 내 눈을 수십 번 의심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바로 <남. 남. 커. 플>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표정 관리하느라 상당히 애먹었다. 라이터를 빌려주던 친구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18’을 연발했다.
이건 찬성하고 반대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개념을 채 가져보기도 전에 처음 접해보는 문화충격이었다. 라이터를 빌리고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로맨틱했다.
여행은 여전히 ‘다름을 인정하는 연속’이고 ‘새로운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탈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행하는 내내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에 감탄한다. 매일매일 다른 일상을 살아간다. 칸쿤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랬다. 어떻게 이런 바다와 하늘이 존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문화가 존재할 수 있었는지 여행해보지 않으면, 하루하루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
오늘 밤 마주했던 문화 충격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상상해보지 않은 하루였다.
여행은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하루를 매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내일은 과연 하루가 채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