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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3. 2022

세상은 의외로 살만한 곳일지도 몰라_과테말라 세묵참페이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어둠인 걸까. 어두컴컴 빼곡한 숲 속 어딘가에서 가끔씩 반딧불이 화르르 반짝거리고 밤하늘 구석구석까지 별들이 가득하지만 이 아슬아슬한 길 위를 밝혀주고 있는 건 오직 달빛 한 줄기뿐이었다. 달빛이 이렇게 밝을 수 있었던가!

들개 짖는 소리, 매미 우는 소리가 가끔 들려오긴 했지만 덜덜한 엔진 소리마저 삼켜버릴 것 같은 무거운 고요함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벌써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8시간째. 처음에는 멀미 때문에, 그다음엔 엉덩이가 찢어질 것 같은 불편함 때문에 세묵 참페이로 가는 길을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간사하게 휴게소가 나타나고 식당이 나타나서 버티고 버티다 결국 이 어둠 속까지 달리고 있다. 소를 실어 나르는 큼직한 트럭 뒤 짐 칸에 서서 밤하늘을 감상하는 것은 그나마 낭만적이라 봐줄 만했다.

 버스에 앉아있을 때는 엉덩이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줄 알았고 겨우 승합차로 갈아탔을 때는 마치 의자에 꺼지지 않는 강력한 진동안마기를 달아놓은 줄 알았다. 

 과테말라는 포장된 도로도, 제대로 된 교통편도 거의 없어서 어디든 이동하려면 몇 번씩 갈아타는 건 기본이고 이동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린다. 이정표가 없는 건 물론이고 일단 바퀴만 달려있으면 무엇이든 탈 수 있었다. 분명 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데 꼭 내가 도로 위를 내달려온 것처럼 온몸이 지치고 힘들다. 

완전 녹초가 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겨우 세묵 참페이 숙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씻고 푹 자고 싶은데 세상에, 이 숙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단다. 당연히 불도 없고 온수도 없었다. 찬물로 대충 씻고 더듬더듬 침대를 겨우 찾아 누웠다.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짐도 풀지 못하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도 못했다. 도시 속에서의 어둠과 산속에서의 어둠은 그 농도부터 달랐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빛줄기조차 아무것도! 오직 소리와 감각으로만 움직였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느끼고 풍경을 보러 온 여행이라지만 전기가 없는 곳을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신기하면서도 황당한데 너무 피곤해서 아무런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한 거라고는 여러 번 차를 갈아타면서 이동한 것뿐이다. 마지막 산길은 건초더미와 오물 냄새로 뒤덮인 가축용 트럭을 타고 왔다. 차라리 소처럼 네발로 짚고 오기라고 했으면 좀 더 편했을까.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매일매일 환상적인 일이 가득하고 재밌는 일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고되고 힘든 날도 제법 많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마음처럼 되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오늘 나의 하루처럼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인생도 여행도 똑같다.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이, 멋진 풍경사진이 전부는 아니다. 

역시나 오늘의 고단함도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내일은 분명 환상적일 것이다.

 고된 일정이었지만 별 탈 없이 도착할 수 있게 도와준 가이드와 나 스스로 감사했다. 내일은 엄청난 풍경이 나를 반겨주겠지. 스르르 눈이 감겼다. 너무 깜깜해서 내가 눈을 감은 게 맞나 싶어 다시 눈을 떴다 감았다. 그때 숙소 옆에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렸다. 가녀린 새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물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였던가. 새소리가 이렇게 청순했던가.     

 아침이 되어 다시 보니 이곳은 마치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채 오직 세묵참페이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묵참페이 속의 숙소였다. 세묵참페이는 바다처럼 예쁜 에메랄드 빛 강물이 흐르는 계단식 계곡이다. 내가 어제 10시간을 죽을힘을 다해 버틴 건 바로 이 멋있는 세묵 참페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묵참페이는 역시나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아무리 화려한 감탄사로 꾸민다 해도 이 신기하고 영롱한 물빛과 황홀함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전망대에서 내려와 바로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가이드 동행 아래, 일행들과 함께 계곡을 따라 이동하면서 수영도 하고 다이빙도 했는데 난 수영을 할 줄 몰라서 주로 튜빙을 했다. 다이빙은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수영을 못한다는 두려움에 결국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거친 물줄기 사이로 미끄럼틀처럼 구불구불 내려오는 폭포 슬라이딩은 참을 수 없었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짜릿하게 슬라이딩을 즐긴 다른 일행들은 이미 물아래로 내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로운 그들의 모습에 순간 자신감이 생긴 나는 힘껏 몸을 날려 물줄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꺄악꺄악! 괴성을 지르며 내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물속으로 풍~덩~.... 어? 그런데 몸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발이 바닥에 닿질 않았고 손을 아무리.. 아무리 뻗어도 무거운 물속을 가를 뿐이다. 어찌 된 일이지? 분명 깊어 보이지 않았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수영이 능숙해 물 위에 떠있었던 건데, 나는 그걸 물이 얕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 찰나의 순간 공포와 두려움이 순식간에 나를 잠식했다. 차디 찬 강물이 점점 더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고 물이 무겁게 느껴졌다. 눈도 안 떠지고 소리도 나오지 않고 너무 숨이 막혀서 미친 듯이 발버둥만 쳤다.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무섭고 두려웠다. 분명 가이드도 있었고 일행도 꽤 많아서 침착하게 있었더라면 누군가는 나를 도와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직, ‘누군가 날 구해줄 거야’라는 희망이 아니라 

‘수영도 못하는 내가 너무 무모했어! 이러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자책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스스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리자 결국 건장한 청년 둘이 나섰다. 잔뜩 긴장한 내 어깨를 양쪽에서 붙잡고 물속에서 꺼냈다. 의외로 쉽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했지만 진정 그들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나는 그들에게 연신 땡큐를 연발했다. 그런데 막상 물 위로 나오고 보니 허탈했다. 물이 깊은 건 사실이지만 넓지는 않아서 몇 번만 팔을 휘저었다면 개헤엄으로도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물 위로 뜨는 걸 하지 못해 나오는 게 버거워겠지만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다. 

순간 다른 일행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내가 좀 더 침착했어야 했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겁쟁이로 보였을까. 괜히 민폐를 끼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헛웃음까지 나왔다. 

이 정도에 내가 사느냐 죽느냐 몸부림을 쳤다니! 누가 보면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조난이라도 당한 줄 알았을 것이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당장 쥐구멍에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별 거 아니었잖아~’ 하고 뒤돌아서는데 방금 물속에서 스스로 자책했던 내가 떠올라서, 혼자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다고 발버둥 치던 내 모습이 가여워서 괜히 서글퍼졌다.

“난 아직도 세상을 믿지 못하는구나, 아직도 혼자라고 생각하는구나.”


일단은 별 일 아닌 듯 일어나 보자, 세상은 어쩌면 살만한 곳일지도 모르니까. 

알지도 못하는 날 구해준 그 청년들처럼.     


처음 보는 사람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구해줬다는 사실에 기분이 참 묘했다. 고맙고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죽기야 하겠어? 혼자면 어때, 수영 좀 못한다고 기죽을 필요 없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구명조끼가 있잖아" 갑자기 없던 패기가 마구 생겼다. 그 청년들이 날 구해주면서 용기까지 나눠주었던 걸까? 

다들 혼자 온 여행자들인데 서로 좀 도와주면 되지 뭐. 그러고는 아까부터 눈여겨본 ‘동굴 투어’를 신청했다. 나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세묵참페이의 계곡물이 이어지는 랑퀸 동굴의 매력은 바로 촛불을 들고 수영으로 헤엄쳐서 동굴 끝까지 탐험하고 오는 것이다. 물론 수영을 못하는 나는 구명조끼 없이는 어려운 투어다. 어둡고 불도 아예 없어서(지금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오로지 촛불로만 시야를 확보해야 하고 물도 꽤 깊은 곳이 많아 위험하기 때문에 수영은 필수라고 했다. 구명조끼는 따로 없으니 신중하게 잘 생각해보라고 가이드는 이미 귀띔해 주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슨 패기와 용기가 생겼는지, 동굴 투어를 해야겠다고 이미 굳게 마음먹은 후였다.

'뭐 죽기야 하겠어? 아까 그 쫄보는 잊어줘!'

나 자신에게 만회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일행들과 똑같이 구명조끼 없이 촛불 두 개를 양손에 들고 투어를 시작했다. 막상 동굴 속으로 들어가니 너무 신났다. 평소에 호러영화도 좋아하고 무서운 것도 좋아하는데 딱 내가 좋아하는 그런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거기에 촛불까지 더해져 분위기가 사뭇 묘했다. 오싹한데 뭔가 로맨틱한 그런 오묘한 분위기! 호러영화 속 오프닝처럼 당장 뭔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은 그런 긴장감이 딱 내 취향이었다. 

동굴 중간부터는 물이 깊어지기 시작해서 바닥에 발이 닿지 않으면 동굴 벽을 짚고 가거나 다른 일행의 어깨를 짚고 갔다. 아까처럼 동네 망신 아니 나라망신 다 시키며 민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넉살 좋게 신세를 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친구들도 그런 나를 이해해주었다. 어떤 친구는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어 주기도 했고, 다른 친구는 ‘아까 그 친구??(동네방네 쥐구멍 사건을 말하는 거겠지)’ 라며 알아보고는 어깨를 내어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아예 촛불도 끄고 초도 가이드에게 줘버렸다. 어떻게든 허우적거리더라도 일행들과 나란히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상 해보니 서툴지만 어떻게든 헤엄쳐 나아가고 있었다. 위험한 순간에는 친구들이 나서서 나를 도와줬다. 박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동굴벽을 기어오르고 두피가 녹아내릴 것 같이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밧줄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조연배우쯤은 되어 미지의 세계를 텀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동굴 끝에 다다르니 어마어마하게 깊은 시커먼 우물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담력 강한 친구들만이 다이빙을 즐겼다. 세상 쫄보인 나는 폭포 아래에서 샤워를 했다. 동굴 속 특유의 울림과 우렁찬 물줄기에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상쾌하고 즐거웠다. 다행히 나처럼 샤워를 즐기는 친구들이 많아 기분이 더 좋았다. 

동굴 투어를 마치고 나는 남은 빵을 일행들과 모두 나눠먹었다. 마트도 없는 산 속이라고 해서 미리 빵과 햄을 잔뜩 챙겨 왔는데 양이 꽤 남아 있었다. 전기도 안 되는 곳이라 다들 식사가 부실했을 텐데 마침 내가 나눠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뿌듯했다. 

마치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참 신기하고 다이내믹한 하루였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목숨을 신세 진 것, 생판 모르는 남에게 자연스럽게 신세를 진 것. 평소의 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오늘 하루 모두 일어났다.

내가 남에게 부탁을 잘 못하는 이유는 소심한 성격 탓도 있지만 

‘당연히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불신’ ‘남을 잘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다. 

사실 거절당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처음부터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하는 건 내가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세상을 잘 믿지 못해서다. 불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세상은 어쩌면 생각보다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의 하루처럼 말이다. 그러니 한 번쯤은 세상을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죽을 듯이 힘들어도 위기는 지나간다. 그리고 위기를 이겨내면 용기가 생겨난다. 용기가 있으면 도전해 볼 수 있고 도전은 새로운 기회를 만든다. 

수영을 못한다고 괜히 걱정할 필요도 겁먹을 필요도 없었다. 막상 부딪혀보면 별 거 아니다. 내가 죽네 사네 했던 그 손바닥만 한 웅덩이도 물속에서는 한없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보면 얼마나 작고 허탈했던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던가! 그 위기를 견뎌 낸 나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얻었던가! 그러니 한 번쯤은 세상을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고민들 또한 그럴지 모르겠다. 일주일 뒤에는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별 것 아닌 것일 수 있고, 몇 년이 지난 뒤에는 후회로 남을 아까운 시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와 다툰 이유가 한 달 뒤에는 ‘고작’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인생의 기로에 섰다고 생각했던 사랑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저 흐릿한 추억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새로운 도전이 두렵고 무서울지라도, 그 순간이 ‘전부’라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막상 부딪혀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다. 세묵참페이의 그 작고 깊은 웅덩이처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50대 50이다. 인생에는 무수히 많은 성공과 실패로 가득하지만 그건 결코 확률게임이 아니다. 공평하게 누구나 50대 50이다. 오늘 실패했으면 내일은 성공하면 된다. 

내가 비록 그 작은 웅덩이에서는 이불이 구멍 날 만큼의 부끄러운 추억을 만들었지만 동굴에서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 것처럼! 나의 인생도 모두의 인생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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