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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3. 2022

어차피 이 여행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_과테말라 안티구아

 세묵참페이에서 다시 8시간을 달려 과테말라 안티구아로 돌아왔고 도착하자마자 나는 맥도날드로 향했다. 지난 며칠 동안 문명에 차단된 채 지냈더니 인터넷과 카페인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티구아 맥카페는 마치 정원이나 고급 레스토랑처럼 넓고 화려했고 와이파이가 끊김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곳인 줄 알았으면 자주 올 걸 그랬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맥카페의 아메리카노가 매우 매우 훌륭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은 치킨버스(미국의 스쿨버스를 개조한 과테말라의 저렴한 교통수단)를 타고 전통시장을 갔다. 과일이 무척 맛있고 저렴했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 구경하기 힘든 체리가 한 봉지에 천 원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녹색이 아닌 주황색의 멜론은 너무 달아서 목이 따가울 정도였다. 같은 과일인데 왜 이렇게 빛깔이 이쁘고 탐스러운지. 견과류 마저도 색감이 이쁘다. 누가 내 눈에 필터를 씌웠나. 

한창 과일 쇼핑을 마치고 시장 구석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잡았다. 꽤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맛집일까 기대해본다. 그런데 메뉴판도 없고 영어가 하나도 안 통해서 그냥 옆에서 먹고 있는 것을 달라고 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손가락 세 개를 가르쳤다. 내가 숫자 3을 손가락으로 써 보이자 아니라고 하며 다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순간 멘붕이 왔다. 

손가락이 세 개인데 3은 아니라니. 13인가? 13은 너무 비싼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10깨찰을 내밀어 보았다. 그랬더니 7깨찰을 거슬러주었다. 그녀는 숫자를 몰랐던 모양이다. 그렇게 오해는 풀렸고 그녀는 수프 한 그릇을 내주었다. 그냥 옥수수 죽처럼 생겼는데 너무 고소하고 맛있어서 한 그릇 더 먹고 나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3깨찰을 내밀었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양을 두 배로 주었다. 


 과테말라에서 이룬 작은 로망이라면 바로 ‘1일 2커피’였는데 특히 안티구아에서는 훌륭한 드립 커피도 자주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자 숙소의 매니저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를 하나 추천해 주었다.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말에 당장 찾아갔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가게라 처음엔 철물점이나 방앗간을 잘못 찾은 줄 알았는데 진한 원두향 덕에 제대로 찾았음을 직감했다. 

하얀 단발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주인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상당한 미남이셨을 것 같았다. 들뜬 우리를 시크하게 한번 쳐다보시고는 이내 앞치마를 두르시며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생긴 낡고 찌그러진 주전자로 커피를 내려주셨다. 특이하게 생긴 드리퍼에 내려진 커피의 고소함과 묵직함은 훌륭함 그 자체였다. 정말 저 주전자는 요술램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끝내주는 맛이었는데 자신이 50년 동안 해 온 전통적인 ‘융드립’이라고 하셨다. 융드립은 느리지만 깊고 풍부한 맛을 내고 있었다. 

나의 여행도 융드립처럼 느리지만 깊어지길 기대해본다.


      

 마지막 날은 안티구아 화산 투어를 신청했다. 반딧불도 볼 수 있고 활화산도 볼 수 있다기에, 주저 없이 신청했다. 우리와 투어를 함께 하게 된 일행은 미국에서 온 그룹이었는데, 무리 중에 동양인 2명이 눈에 띄었다. 한국인 같아 말을 걸었는데 너무나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그런데 난 한국말로 질문했는데 내 말을 이해하고 대답한 것일까? 

투어 내내 그들은 의식적으로 우리를 경계하는 것 같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애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 우리가 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미국인 친구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던 그들은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영어로 일일이 해석해주며 미국인 그룹을 이끌었다. 그런 그들을 그룹 친구들은 좋아했고 투어가이드는 편애했다. 스페인어가 서툰 우리는 항상 투어 맨 끝에 남았다.

화산재가 쌓인 길 위에는 나무와 풀들이 특이한 모양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들이 이룬 숲에서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활화산을 지배하는 호빗족과 반딧불을 다루는 요정이 숨어 살고 있을 것 같다.

힘들게 오른 정상에선 바위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로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었다. 달콤한 마시멜로우를 먹으며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두 명의 동양인은 덩그러니 떨어져 간식을 먹고 있다. 하루 종일 무리들을 이끌며 무던히 애쓰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겉도는 것 같아 보인다. 

하산하려고 막 길을 나서는데 동양인 여자가 나지막이 “아 더워~”라고 한국말로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잘못 들었나? 다시 뒤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어느새 미국인 친구와 잔뜩 버터 바른 영어를 하고 있었다. 

이미 해가 다 지고 도착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갑자기 아주 또렷한 한국말로 “한국 어디에서 오셨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순간, 몹시 불쾌했다. 이미 미국인 친구들은 다 사라지고 동양인 넷만 남은 자리였고 질문하기 전 그들은 주변에 미국인이 있는지 눈치를 살폈던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인인 것이, 아니면 자신들이 한국인인 것이 부끄러운 걸까? 오늘 하루 종일 그들이 우리를 의식하며 일부러 왕따를 시키고 말을 걸어도 영어로 대답하며 시종일관 무시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떤 사고방식을 대입해도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을 한번 쏘아보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시큰둥한 미국인 친구들에게 또 애를 쓰며 비집고 들어갔다. 

다음 날 우연히 마주친 그들에게 일행이 급하게 버스시간을 물었다. 한국인임을 들켰음에도, 한국말로 물었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버터 바른 영어로 대답하고 있었다. 너무 재수 없어서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다. 제시간에 버스가 안 와서 다들 애가 타는 상황인데 거 참 무슨 심보인지,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이 있는데 우리 소통 좀 합시다! 대체 왜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까지 영어로 말하고 있는 건지 답답할 노릇이다. 허세인지, 고집인지, 신념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가슴 아픈 사연이라도 있나? 

여행하면서 가장 불쾌했던 순간이다. 에콰도르에서는 자신을 북한 사람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끝까지 한국말을 안 하는 사람도 봤는데 북한 사람은 한국말 안 쓰는지 처음 알았다. 어떤 사고방식을 대입해봐도 그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수많은 것을 이해했지만, 끝끝내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은 걸까? 

그런데 억지로 이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저 다른 것인데.


원래의 나였다면 '나를 무시하나? 내가 뭘 잘못했나?' 괜히 눈치가 보여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척 뭐라도 아는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이 맞나?'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화가 나도 화나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오늘 나는 제대로 불쾌함을 표현했다. (물론 내 기준)

스스로 좀 놀라웠다. 나에게 이런 면도 있구나. 

내내 불쾌함을 느꼈다면 불쾌한 게 맞다. 한 순간이라도 행복했다면 그 순간은 행복한 것이 맞다. 내 감정에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화나면 화가 난다고,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말해도 된다. 

어차피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남은 하루는 나만의 시간에 집중하고 싶어서 어제부터 찍어 두었던 카페로 향했다. 원두가 좋아서인지 거품이 가득하고 향이 진했다. 과테말라 여행정보를 찾아보니 블로거들은 또 앞다투어 최단경로를 올려놓았다. 어느 날부턴가 여행정보는 구글링으로 찾고 있다. 

과테말라는 무심한 듯 때 묻지 않은 날 것의 매력이 있다. 마치 눈에 채도 필터를 씌운 것처럼 원색의 색감이 살아있는 도시다. 그중에 안티구아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도시답게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무엇보다 늘 기분 좋은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안티구아에는 스페인어를 배우는 학생과 여행자가 많았는데 이렇게 멋진 도시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무척 매력 있을 것 같다. 안티구아의 평화롭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어학원을 살짝 고민했지만 나는 느릿느릿,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 여행의 주인공은 나니까.


오늘 일은 더 이상 불쾌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그들만이 꿈꾸는 세상이 있겠지...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버터 바른 영어를 한다고 해서 한국인임이 변하지는 않는다. 

원래의 모습을 두고 왜 다른 모습으로 보이려 했을까? 그저 우리에게는 '미국인 흉내 내는 한국인' 일 뿐인데. 미국인 친구들에게 그저 영어 잘하는 한국인일 뿐인데. 아무리 애써도 변함이 없는데. 

미국인한테는 영어를 하고 한국인에게는 한국말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원래의 나를 숨기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 괴롭고 힘들지 않을까? 

우리 그냥 잘하는 거 열심히 하고 원래의 나대로 살아보는 건 어때.

근데 말이야, 원래의 나대로 사는 것도 참 힘들더라. 아직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거든.

그래서 내일도 내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해. 어차피 이 여행의 주인공은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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