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를 거쳐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바로 칸쿤을 보기 위해서다. 칸쿤으로 바로 이동해 그곳에서 화려한 생일을 보내고 싶었지만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에서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혁명가로 유명한 체 게바라는 이 호수를 두고
‘너무 아름다워서 이곳에서 혁명을 멈추고 싶다’라고 해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꼭 오고 싶었다. 실제로 마주한 호수는 화려하지 않지만 볼수록 마음 깊이 새겨지는 곳이다. 몇 개의 화산으로 둘러싸인 아티틀란 호수 주변으로는 수 십 개의 마을이 모여있다. 마을마다 분위기가 다 달라서 여행객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몇 개의 마을을 돌면서 머무른다.
호수가 넓어서 마을을 이동할 때는 ‘란차’라는 작은 배를 이용한다. 원래 계획은 두 어군데 잠깐 머물다가 칸쿤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중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을에서 생일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곳에서도 가장 높고, 가장 비싼 호텔에 짐을 풀었다. 비싸다고 해봐야 삼만 원 정도였고 한국에서 이 정도 수준의 숙소를 구하려면 수 십만 원은 들었을 것이라 위안하며 플렉스 했다.
비록 혼자였지만 해외에서 처음 맞아보는 생일이라 소소하게라도 챙겨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레토르트 미역국과 햇반을 개시했고, 저녁에는 비싼 메뉴도 하나 시켜 호사를 부릴 참이다.
새해에만 보던 일출을 생일에 한번 보자 싶어 새벽부터 호수에 나갔다. 최근 일출과 일몰을 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여행이 끝나면 없어질 수도 있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빨래를 하는 엄마들도 보이고 낚시를 하는 아빠들도 보였다. 특히 카약을 위에서 낚시를 하고 일몰을 보는 모습에 반했다. 당장 카약을 타고 싶어서 호텔에 문의하니 예약하지 않고도 바로 탈 수 있을 거라고 알려줬다. 나는 신나서 길을 나섰다.
이른 점심시간이었는데 카약을 타려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난 그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호수는 햇살에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고 카약을 타기에는 햇살이 너무 따갑고 눈부셨다. 하지만 나는 적당한 시간대를 기다릴 수 없어서 선글라스를 끼고 타기로 했다.
분명 노 젓는 법을 잘 알려주셨고 나는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해 물 위로 올랐다. 처음에는 제법 잘 저어 나아갔다. 호수 위에서 바라보는 산의 풍경은 또 색달랐다. 중세시대 요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고 카약이 아닌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 탐험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한참 풍경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갑자기 웅성웅성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어 앞을 보니 뱃머리는 이미 육지 가까이에 닿기 직전이다. 당황해서 노를 저으려는데 갑자기 노 젓는 법이 생각이 안 난다. 뻣뻣해진 내 팔은 박자가 하나도 안 맞는다. 빨래하시던 아주머니가 다급하셨는지 벌떡 일어나셔서 팔로 직접 노를 저어 보이신다.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는 내가 웃기는지 빨래하던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크게 웃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노를 저어 겨우겨우 호수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쉬지 않고 노를 저었더니 금세 지쳐서 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배를 반납했다. 배를 정리하던 소년이 나무에서 시퍼런 바나나를 하나 따준다. 낯선 푸른빛이 못 먹는 것처럼 생겼는데 꿀맛이다.
카약까지 하고 나니 이젠 정말 할 일이 없어 호숫가 근처를 걸었다. 그러다 과테말라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한국인 일행들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가 너무 반가워서 동시에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거품과 향이 장난 아닌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여행 이야기와 한국에서의 삶을 나누었다. 개인사는 먼저 물어보지 않는다. 하지만 얘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된다. 늘 마음과 귀는 열려있다. 오랜만에 한국말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이 반갑고 즐거웠다.
갑작스러운 우리의 만남은 힐링이었다.
처음부터 이 호텔에서 눈여겨보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무료 스파 서비스였다. 저녁에는 루프탑에서도 가능하다고 해 미리 오늘 저녁으로 예약해 두었다. 야경을 보며 야외 스파를 ‘제대로’ 즐겨 보기로 했다. 생일이라고 하니 와인 1잔을 서비스로 주셔서 한껏 럭셔리해진 기분이다.
일부러 예쁜 원피스도 챙겨 입었고 낮에 산 목걸이도 걸쳤다. 목걸이는 원석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했는데 마침 원피스와 너무 잘 어울렸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파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침 온도도 딱 맞았다.
호텔 옥상은 주홍색 지붕들 사이에 가장 높이 있어 양 옆으로는 온통 주홍빛이다. 왠지 노을이 비치면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호수와 높게 치솟은 화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숫가 한편에서 빨래하는 엄마부대와 카약을 즐기는 여행객들 사이로 여러 대의 란차가 부지런히 호수를 가르고 있었다.
‘오늘 내가 저 호수 위에서 카약을 타며 박치를 보여줬었지..’ 몇 시간 전의 부끄러운 추억이 스쳤다.
‘그래도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웃었으니까’ 라며 작은 위안을 삼았다. 뜨끈뜨끈하게 몸이 녹아들고 있었고 곧 스르륵 눈이 감길 것 같았다. 그때 호텔 바로 옆 주홍색 지붕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익숙한 듯 내 옆에 눕더니 반대편 호수를 지긋이 바라본다. 고양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문득 올려다보니 그곳은 호수 전체가 석양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하늘과 고요한 호수가 온통 주홍빛으로 수놓은 수채화처럼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주홍색 지붕들에 색채가 더해지며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따뜻한 욕조 안에서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선물 같은 시간이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고양이 녀석이 나에게 근사한 생일선물 주고 간 것 같다.
석양에 반짝거리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은 평화롭다. 호수의 소리는 고요하지만 가볍지 않다. 조용한 울림과 묵직한 스며듦이 있다. 서서히 마음이 평온해지고 차분해진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이 닿은 곳에서 맞이한 생일은 차분하고 소소한 일상, 수많은 하루 중의 어느 날이었다.
한국에서는 특별하게 보내려고 애쓰던 생일이었는데, 이상하게 대부분 허무하고 더 외로웠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어 평범하게 보내려고 했더니 오히려 선물 같은 소중한 하루가 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저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가짐.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좀 더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매일매일을 생일처럼 오늘 같은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의 일상이 나의 인생이 채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