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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7. 2022

온 우주가 널 응원해_쿠바, 뉴욕

 딱 봐도 애매한 시간에 잔뜩 짐까지 짊어진 우리가 급해 보였는지 기사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저마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마음은 급하고 협상도 안돼서 답답한 와중에 한 기사가 마침 그쪽에 볼일이 있으니 저렴하게 태워주겠다고 했고 자신을 카를로스라고 소개했다. 딱히 올드카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차는 형편없었다. 그래도 싼 값에 감사했고 무뚝뚝하고 시크한 그의 인상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달리는 도중에 갑자기 차를 세우고는 

‘여기 유명한 곳인데 가봤어? 안 가봤으면 세워줄게 구경하고 가’ 라며 쿨하게 내린다.

그런데 맙소사, 그곳은 그 유명한 혁명기념탑과 체 게바라 조형물이 있는 혁명광장이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구시가지에서 차로는 10여분 거리지만 차 없이는 오기 힘든 곳이라 와보지 못했던 곳인데 카를로스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혁명광장에는 쿠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인물 체 게바라와 그와 함께 한 또 다른 혁명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조형물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곳에는 혁명기념탑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있고 그 앞에는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가 있다. 

이 작은 나라에도 독립을 위해 투쟁한 수많은 위인들이 존재하고 여전히 삶 가까이에서 그들을 항상 기억한다. 작지만 기품 있는 나라. 어쩌면 우리와 같은 심장이 뛰는지도 모르겠다. 유명한 관광명소인 만큼 올드카 투어의 필수코스여서 관광객이 제법 많았다. 일렬로 줄지어진 올드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기에 여유 있게 사진까지 다 찍고 다시 카를로스의 차에 올랐다. 

 한참을 달린 그는 또다시 유명한 곳이라며 낯선 곳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번에는 정말 생소한 외진 곳이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현지인들이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오는 곳이란다. 허름한 관광지 분위기라 의심스러웠지만 그를 믿고 들어가 보니 그곳은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정글이었다. 발아래로 집채 만한 악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고 먹이를 던져주면 떼로 몰려와 잔인하게 먹이를 물어뜯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쿠바에서 악어를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다양한 크기의 악어쇼를 실컷 구경하고 나오니 카를로스는 놀이공원을 구경시켜주는 아빠처럼 사진도 찍어주고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주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얼마 가지 않고 그는 숲 속 어딘가에서 또 차를 멈춰 세웠다. 이제는 기대감마저 생겼다. 세상에! 이번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카리브 바다가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한쪽에서는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 강습을 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먼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빛나고 있어 당장 뛰어들고 싶었다. 

카를로스는 정말 기가 막힌 포인트가 있다며 우리를 숲 속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이제는 그에게 강한 신뢰가 생긴 우린 의심 없이 뒤를 따랐다. 덩굴 숲을 지나고 나니 그곳에는 요정들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비밀요새가 나타났다. 절벽 사이로 바다처럼 푸르고 영롱하게 빛나는 큰 연못이 내리쬐는 햇살을 흠뻑 안고 있었다. 눈 부시도록 반짝거리는 감격스러운 풍경이 이런 숲 속에 숨어 있다니. 

이곳은 몇몇 현지인들만 알고 있는 다이빙 포인트라고 했다. 보기에는 큰 연못 같지만, 사실은 바다와 연결된 곳으로 수심이 굉장히 깊다고 했다. 연못 속은 신비한 물고기와 산호초가 많아서 다이버들이 아끼고 아끼는 곳이라고 했다. 당장이라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롤로스 덕분에 현지인이 아니면 모를 숨겨진 비경까지 보게 되었으니 대단한 행운임이 틀림없다. 전화위복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에게 ‘카를스 투어’라고 불러주었고 당신 덕분에 우리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플라야 히론에 도착하자 카롤로스는 우리가 숙소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숙소마다 거리가 제법 있어 우리가 일일이 찾아다녔다면 반나절은 걸릴 일이었다. 그는 우리를 배려해 깨끗하면서 여자가 주인인 곳을 찾아주었다. 우리의 여행은 그로 인해 꽃길 아니 비단길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우리는 멕시코 쉘하와 비슷한 칼레타 부에노로 향했다. 표를 사려는데 우리 둘 다  깜빡하고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 방금 우리는 하루에 한 대 뿐인 버스를 타고 왔고 돌아가는 버스는 오후에 한 대 뿐이다. 머리가 하얘진 우리는 로봇처럼 일시정지가 됐다. 보다 못한 매표소 직원이 자신의 차로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준 덕분에 우리는 칼레타 부에노에 입장할 수 있었다. 쿠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친절한지 모르겠다. 

입장료에는 음료와 식사가 포함이라 우리는 간단한 식사로(5접시) 워밍업 후 물놀이를 시작했다. 깊지도 않은 물에 스노클링을 하다가 나는 또 호들갑이었고(구명조끼가 없었다) 자신감을 잃은 나는 썬베드에서 낮잠을 자려다가, 스킨스쿠버가 35불이라는 말에 솔깃해 바로 도전했다. 칸쿤보다 쿠바의 바닷속 세상이 훨씬 다채롭고 예뻤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석양이 이쁠 것 같은 기가 막힌 해변가 하나를 발견하고는 GPS로 장소를 찍어두었다. 피자를 사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도통 택시가 안 보인다. 마침 피자집에서부터 우리에게 말을 걸던 아저씨가 가까운 곳이면 태워주겠단다. 마침 해가 지고 있고 피자 냄새가 코 끝을 찌른다. 택시비를 드릴 테니 태워달라고 했다. GPS를 보여주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흔쾌히 우리를 태워주셨다. 

한참을 달리던 아저씨는 갑자기 조수석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셨다. 뭐지? 긴장하려던 그때, 정말로 우리는 깜짝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도로를 달리는 중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럼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마치 캐리비안의 해적 잭 스패로우처럼.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웠지만, 여기는 쿠바가 아니던가! 

다행히 목적지에 잘 도착했지만 우리는 이곳의 실체에 실망하고 말았다. 일단 모기가 미친 듯이 많았고, 생각만큼 석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정말로 석양이 예쁜 곳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서둘러 우리를 태웠다. 역시나 한 손에는 럼주와 함께. 그리고 그의 말대로 정말 끝내주는 석양이 걸쳐져 있는 수평선 위 바다로 우리를 내려주었다. 바다에는 석양이 바로 보이는 바위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부부와 우리뿐이었다. 

'왜 이렇게 멋진 곳에 아무도 없을까?’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곧 의문은 풀렸다. 해변가가 온통 바위뿐이다. 울퉁불퉁 뾰족한 바위들 사이에 제대로 앉을 곳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의 차 트렁크에 대충 걸터앉아 피자를 나눠 먹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기념사진도 찍었다. 택시비를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먼 나라에서 온 너희들에게 그냥 예쁜 걸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너희들 천사야? 왜 이렇게 친절하고 착해? 

그가 결국 수줍게 받은 것은 한국에서 가져온 민트향이 나는 캔디 몇 알 뿐이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하루 종일 행운이 따르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카를로스를 만난 이후부터 마치 온 우주가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인생의 모든 운을 다 쓰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 날 우리는 플라야 라르가라는 다소 생소한 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정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용한 바닷가 마을로 얼마 전 티브이에 나온 영상을 보고 찾은 곳이다. 장소가 생소했던 우리는 역시 카를로스의 택시를 타고 히론에서 라르가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히론의 한 병원에서 부인과 아들을 만나고 가겠다고 했고 마침 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은 카를로스가 가족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필 히론에 사는! 어쩜 이런 기가 막힌 우연과 행운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온 우주가 우리의 여행을 응원하고 있는 모양이다. 


라르가는 고급 휴양지처럼 조용하고 예쁜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힐링을 해보자며 우리는 아무 일정 없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숙소에서 문을 열면 바다가 나타나고 훌륭한 식사도 숙소에서 먹을 수 있다. 고급 리조트 부럽지 않은 휴식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했다.  

마지막 일정은 각자 원하는 곳으로 향했는데 나는 다시 아바나로 향했다. 아바나의 노을이 그리웠고, 꼭 보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아서였다. 아바나 골목길 구석에 젊은 청년 세 명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공방이 하나 있었다. 그림이 하나같이 너무너무 근사하고 이뻤는데 아바나에서의 마지막 날, 그림을 사려고 갔을 때는 하필 쉬는 날이었다. 그 그림과 사진들이 아바나의 노을과 함께 기억에 남아 나를 다시 아바나로 향하게 했다. 다시 그 공방을 찾았을 때 그 청년들은 나를 기억해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바나의 노을은 끝내줬다.  

   

 우리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뉴욕에서 유일한 로망이라면 바로 ‘센트럴파크에서의 피크닉’이었다. 처음 뉴욕행을 결심했을 때 주저 없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가장 가슴 뛰게 만들었던 이유였다. 그래서 뉴욕에 혼자 남은 마지막 일정은, 아껴둔 로망인 센트럴파크에서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었다. 

그런데 쿠바를 떠나기 전부터 내리던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다. 제발 오늘 하루만 멈춰 주었으면 좋으련만! 근처 스타벅스에서 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지만 오후 3시가 넘도록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는 너무 아쉬워서 우비를 단단히 챙겨 입고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핸드폰 네비를 보며 걷는데 아까부터 뭔가가 자꾸 어깨에 걸린다. 뭐지? 옆을 돌아봤는데 키 크고 잘생긴 훈훈한 남성이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로맨틱한 일이 뉴욕에서는 흔한 일이던가? 

놀라움과 설렘에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그는 어디까지 가는지 알려주면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했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우비가 세상 귀여운 물방울무늬 무늬라서 아마 우산도 없이 길을 헤매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센트럴파크까지 간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때 나는 그에게 그럼 다른 좋은 생각이 있냐고 물었어야 했다. 어쩌면 한 번쯤은 일어난다는 ‘여행 중 로맨스’가 일어날 수는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난 오늘이 뉴욕의 마지막 날이라 꼭 가야 한다고 말하고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남자는 한참을 나를 눈으로 배웅하는 것 같았고 나를 향해 행운을 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록 뉴욕에서의 나의 로망(센트럴파크도, 결국 로맨스도)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오늘 처음 본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응원해주었다.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해야 하나? 공항을 간다고 말해야 하나?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한 건가? 

‘나의 고향은 한국이고 지금 돌아가려고 공항에 가’라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그는 피식 웃더니 공항 가는 기차는 다른 플랫폼에서 타야 한다고 제대로 된 플랫폼 번호를 알려주었다. 순간 멍해져 주변을 보니 다들 공항 가는 사람들 치고는 옷차림이 가벼웠다. 나 혼자 덩그러니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막 열차가 들어오던 찰나 그는 유난히 눈에 튀던 나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면 난 그 열차를 타고 뉴욕을 방황하다 비행기를 놓쳤겠지. 이곳에서도 나의 여행을 응원하고 있구나.


 두 번째 긴 여행 후 나는 많은 용기와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를 응원해주고 누군가가 나를 지켜준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함께 한 친구의 배려에, 카를로스의 친절에 그리고 나의 여행을 응원해 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마음껏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었다. 

덕분에 꾸역꾸역 애쓰며 감정을 소모하고 상처를 받았다 스스로 위로했던 지난 시간들에 진심을 다해 돌아볼 수 있었다. 이번엔 참 운이 좋아서 응원받는 기분이었고, 그 기분이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나를 응원해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있는 힘껏 나를 응원하며 살아야겠다. 온 우주가 나를 응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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