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콩 샐러드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바람 한 점 없다. 집안의 공기가 제법 차갑다. 양말을 신고 집안에서 입는 덧 옷을 입었는데도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추위가 느껴진다. 덧 옷이 닿지 않는 무릎부터 신발이 덮어주지 못하는 발목까지가 제일 춥다. 덧옷을 잡아당겨 무릎 아래까지 닿을 수 있게 늘려 보지만 옷자락은 금방 되돌아가 잠깐이라도 온기를 느꼈던 곳이 더 시려진다. 고양이들은 오늘의 날씨를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어디론가 숨어들어 잠잠하다. 아마도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잘 것이다.
어제저녁에 담가 두었던 병아리콩을 익히기 시작한다. 단단한 병아리콩을 익히는 데에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익히기 전에 반드시 불려두어야 아침나절에 익혀서 점심으로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전날 저녁에 따뜻한 물에 식소다를 반 스푼 넣고 콩을 담가 두었었다. 마른 병아리콩이 얼마나 단단한 지 이탈리아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벌줄 때 바닥에 병아리콩을 깔아놓고 그 위를 무릎으로 걷게 했다고 한다. 작은 돌조각처럼 단단한 콩을 무릎으로 걷다 보면 아이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아팠을까. 그 아이들의 엄마는 그 콩을 다음날이면 부드럽게 익혀서 맛있게 먹게 했으리라.
잘 불은 병아리콩을 깨끗하게 헹구어서 건져두고 깊이가 있는 냄비를 꺼낸다. 셀러리 한줄기, 당근 한 개, 양파 반개를 넣고 병아리콩을 넣고 그 위에 물을 넉넉히 붓는다. 올리브유를 한 숟가락 넉넉하게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불을 낮춰서 느긋하게 익히기 시작한다. 콩이 익어가면서 구수하면서도 아직도 낯선 냄새가 집안에 퍼지기 시작한다. 콩이 익는 냄새가 구수하긴 한데 비교할 대상이 없다. 팥을 삶을 때 나는 냄새도, 메주콩을 삶을 때 나는 냄새도, 밥이 뜸 들 때 나는 냄새도 아닌 냄새다. 햇수로는 이탈리아 요리를 하고 있는지가 20년도 더 되었는데 난 늘 냄새를 한국의 음식에서 찾으려 한다. 병아리콩이 익을 때 나는 냄새는 구수하지만 추억이 없는 구수 함이다.
내 엄마의 부엌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못해 초라했다. 정월대보름에 사 둔 복조리를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있는 부뚜막 위에 아무렇게나 걸어두었었다. 엄마는 농사에 육아에 시어른 봉양에 자신을 다 나누어 주고 부엌에서는 당신 맘대로 할 수 있었는데 거기를 예쁘게 꾸밀 생각은 못했던 거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주방과 거실이 따로 분리되어있지 않다. 아래층 소냐의 주방은 거실과 분리되어 있다. 애초에 집을 지을 때에는 주방과 거실을 분리했었는데 내가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벽을 헐고 두 공간을 합쳐놨던 거다. 그래서 책상도 되고 식탁도 되는 탁자에서 인터넷 검색도 하고 메시지도 읽으면서 병아리콩이 잘 익어가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옆에서는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나면서 콩이 천천히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가끔 물이 다 졸았는지 확인만 해주면 병아리콩은 스스로 익어 맛있게 변해간다. 병아리콩은 익으면 샐러드로, 파스타와 함께 익혀 국물 있는 파스타 요리로, 곱게 갈아서 수프로도 먹을 수 있는 영리한 콩이다. 병아리콩은 무엇보다 부드럽게 익히는 게 중요한데 익힐 때 소금을 넣지 않는 것이 비결이다. 소금 간은 콩이 다 익었을 때 해주면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지역에 따라 콩을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리구리아에서는 farinata라고 부르는 병아리콩가루로 빈대떡처럼 부쳐 먹는 음식이 있다. 토스카나에서는 cecina라고 하는 병아리콩 케이크가 있다. 피에몬테 지방에는 병아리콩을 돼지갈비와 함께 푹 익혀 먹는 zuppa di ceci라고 하는 병아리콩 수프가 있다. 로마가 고향인 시어머니는 겨울이면 이 콩을 넉넉하게 삶아서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파스타와 함께 익혀서 점심에 내시곤 한다. 로즈마리 향이 솔솔 나는 이 '파스타 체치' 한 그릇이면 바깥에서 시달리던 몸과 마음의 긴장까지 스르르 풀린다.
워낙 단단한 콩이어서 부드럽게 익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보통은 한 시간 정도를 잡아야 한다. 콩도 콩 나름이라 열매를 맺고 수확이 된 곳에 따라 익는 시간도 다르니 병아리콩이라고 다 똑같이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시누 남편의 고향인 칼라브리아에서 온 이 콩은 오래 익지만 질감이 부드럽고 맛도 달콤해서 좋아한다. 이렇게 병아리콩을 익히고 있으니 시간에 대한 표현도 나라마다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는 차 한 잔 우리 내는 시간, 한국에서는 밥이 뜸 드는 시간, 이탈리아에서는 스파게티가 익는 시간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이제 곧 식사가 준비될 거라는 말로 "파스타를 냄비에 넣었어"라고 하기도 하니까.
오늘 점심에는 잘 익은 병아리콩을 소금과 올리브유로 맛을 내고, 건조 로즈마리를 살짝 뿌려 향을 더한 병아리콩 샐러드를 함께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