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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Sep 21. 2024

아이스크림 케이크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날이 흐려 달도 보이지 않는 새벽, 미끄럼틀 옆에 자리한 가로등만 빛을 냈다. 우리는 그 빛을 피해 그네에 앉아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로 모래를 툭툭 찼다. 그러다 말을 꺼냈다.

 “너, 그, 해외 봉사하더라.”

 “해외 봉사가 아니라 워홀 서포트 같은 거.”

 “그게 뭔데?”

 “워홀하고 싶은 사람들 도와주는 거지. 그걸로 돈도 벌고.”

 “신기하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너 정확히 알면서 물어본 거지.“

 “그냥 들었어. 친구들한테.“

 “네 친구들 나 싫어하잖아. 그리고 내 소식 아는 네 친구들 없을 텐데.”

 나는 눈을 흘겼다. 너는 웃고 있었다.

 “그래, 네 인스타 봤다. 옛날 계정 그대로 쓰더라.”

 “너도잖아. 나도 가끔 네 인스타 봤어.”

 눈이 마주친 채 잠시 시간이 흘렀다.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나는 다시 발로 모래를 차며 말했다.

 “의사 된다며.“

 “내가?“

 “스무 살 때 나한테 그랬잖아. 의사 될 거라고. 그래서 반수 하는 거라고.”

 “아.“

 너는 피식 웃었다.

 “스무 살이었잖아. 의사 되는 게 젤 성공하는 건 줄 알았지. 나 정도면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난 믿었는데.”

 “참나, 그래서 의사 되면 결혼해 준다고 했냐?”

 “넌 뭐 그런 걸 기억하냐.”

 “내가 반수 하면서 그 말을 얼마나 곱씹었는지 알아?”

 “원망하지 마. 그땐 나도 스무 살이었잖아.”

 “원망 아니야. 그냥 그랬다고.“

 나는 코를 한 번 킁, 먹었다. 초겨울 바람이 목도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넌 배우 된다며.“

 널 바라봤다. 너는 말을 이어갔다.

 “난 기대했는데. 가끔 네이버에 네 이름 검색해 봤어.“

 “나 연기 못했잖아.“

 “아닌데.”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알지.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

 “... 맞네. 근데 너 그날 늦었잖아.”

 “수업 째고 네 연극 보러 간 건 생각 안 해주고?”

 “너 원래 수업 자주 쨌잖아. 야자도 째고.”

 “야자 째고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간 날 기억해?”

 “어, 나 학원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프라이즈 한 거. 난 진짜 네가 미친 줄 알았어.”

 “좋아했으면서.”

 “좋았지.“

 진짜 좋았는데. 이 말은 내뱉지 않았다. 너는 그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기 위해 자전거를 탔다. 학교 버스는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30분 뒤에 출발했다. 너는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학교에서 가게까지 차로 왕복 30분이 걸렸는데, 너는 그 거리를 자전거로 질주했다. 내가 널 봤을 때, 땀으로 젖은 네 머리카락은 겨울바람을 맞아 굳어있었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케이크를 퍼먹었다. 드라이아이스가 없었지만 아이스크림은 녹지 않았다. 그만큼 추웠다. 그래도 좋았다.

 “2학년 때보다 1학년 때 더 잘했는데.”

 “뭘.”

 “연극. 그때 보러 왔어야지.”

 “그때 우리 사귀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우기기는. 어째 넌 열여덟이나 지금이나 똑같냐.”

 우린 열여덟에 만나 일 년을 사귀었다. 네 부모님은 날 좋아하지 않으셨다. 끝은 좋지 않았다. 너는 여러 번 날 붙잡았지만 나는 욕을 하며 널 밀어내야 했다. 스무 살 땐 술에 취해 마주쳤다. 너는 날 집까지 데려다줬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었던 그 공원을 빙빙 돌며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의사니, 배우니, 결혼이니, 그런 것들. 그리고 만나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닌데, 나 완전 변했는데.”

 너는 날 빤히 쳐다봤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나 이제 어른이야.”

 “그래? 그럼 내가 잘못 봤나 보다.”

 “응, 네가 잘못 본 거야.“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봤나 봐.”

 너는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정리가 안 된 말들이 마음속을 헤집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바닥을 보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나는 말했다. 몸이 떨렸다. 시린 바람 때문이었다.

 ”다신 안 볼 거야.“

 너는 그네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푹 숙인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 손은 찼다. 너는 내 머리칼을 오래 쓰다듬었다. 나는 그 손길을 느끼면서, 내가 연극 무대에 서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울컥 쏟아지는 감정을 눌러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했다. 미처 다 막지 못해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이 발로 파둔 모래 구덩이 속으로 툭 떨어졌다.

 “그래.“

 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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