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행에서 곧바로 입원까지. 몇 달간의 불규칙한 식습관과 마음의 불안정함을 잊지 않고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마음을 따르는 몸. 인간의 육체는 정신에 굴복한다. 아침부터 시작된 복통을 참다가 저녁이 되니 두려움이 더해져 처음으로 응급실이라는 곳을 내 발로 가게 되었다. 역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신이었다.
진단명은 마비성 장폐색과 장염. 소장이 마비되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평소에 소장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장이 멈출 수 있다는 것과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속은 말없이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4인실이었지만 내가 첫 환자인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이틀의 금식동안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지만 내내 잠이 쏟아졌다. 응급처치 후 진통이 멎고 나니 몸도 놀랬나 보다. 평소에 잠을 덜자는 부지런한 인간이 아닌 내가 잠을 못 잔 사람처럼 계속 잠이 왔다. 병원이 아니라 호텔을 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잠을 자는 내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잠결에 간호사들이 수시로 혈압과 체온을 재러 들어왔다가 나가고 청소 아주머니의 부스럭거리는 정리소리와 복도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진지한 의견인 듯 별 일 아닌 듯한 수다 같기도 한 크고 작은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모든 것들은 현실이었다가 곧 꿈이 되었다.
가끔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키면 병실 창밖으로 하얀 햇살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곧 내 마비된 장들도 햇살 속에서 꿈틀댈 것 같았다. 봄날의 햇볕은 병실에서도 똑같이 흘러 나의 병실은 봄이 되었고 햇살에 나의 시간도 마비되었다. 정지한 시간은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어디론가 떠난다.
4일간의 감옥살이에서 풀려나 병원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데 내 앞에 노신사 같은 할아버지가 차를 대시더니 운전석에서 내리셨다. 그리고는 재빨리 병원 휠체어에 뒷좌석의 할머니를 힘겹게 옮겨 태우셨다. 아직 오지 않은 택시 덕택에 나는 할머니를 부축하여 휠체어를 인도로 이동하는 것을 도와드리는 중에 할아버지는 주차를 위해 다시 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셨다. 할머니는 내게 고맙다고 하시며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소녀의 수줍은 미소로 “ 아직은 쓸만해 ” 하고 귀띔해 주셨다. “ 아주 많이 유용한데요..” 나의 귓속말에 우리는 한동안 서로 웃었다.
아직은 쓸만한 관계
머리가 하얀 노부부가 그렇게 둘이서 늙어간다. 늙은 두 사람이 서로의 병원에 같이 가주고 서로 걱정하며 챙겨주는 모습은 마치 두 어린 남매가 손을 잡고 걷는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상대방의 노쇠하고 소진되는 힘을 의지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노부부는 아름답다. 자신에게 사라져 가는 것을 기꺼이 서로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 그 하나가 연약한 그들의 육체를 버티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편안해지는 것이 오래가는 사랑의 비밀이리라. 말 따위에 감정을 상하는 차원을 넘어서면 말이나 행동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 너머의 것들로 두 사람은 소통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마음을 이미 그들은 공유했기 때문이다. 통통한 체격의 할머니를 들어서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은 분명 아닌데도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자존심을 지켜준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 말하며 자신과 할아버지를 사랑한 할머니. 귀여운 할머니와 멋쟁이 할아버지의 일상이 눈에 선하다. 때로 장난기 많은 할머니의 투정이나 짓궂은 말도 점잖은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속과 다른 말 같은 것에 아랑곳없이 쑥스러운 듯 못 들은 척 넘어가며 할머니를 챙겨줄 것이다. 할머니 또한 할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마운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할 것이다. 그들이 지나온 그 깊은 세월의 강 위에서 많은 감정들을 다 흘려보내고 남은 그 사랑, 사랑인 줄도 모르는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길 위의 노부부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들의 사랑으로 가슴이 뛰었으니 말이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