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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Aug 11. 2020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일' 선배의 고마움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11

막 입사했을 당시, 편집장님과 나는 열 살 정도 차이가 났고 그 아래로 세 명의 선배가 있었는데 모두 70년대 생들이었다. 5년 차 선배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편집장님이 무슨 업무를 주든지 척척 해내는 선배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포스가 느껴졌다(……선배님, 잘 지내시죠?).


나를 (아마도) 뽑아주신 편집장님은 세대차를 두려워하면서도 은근히 취향이 잘 통하는신입 사원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그러고 보면 출판계에 들어오는 ‘신입’이라는 친구들은 모두 또래보다 윗세대의 문화에 심취해 있는 건 아닐지…… 오래된 매체 ‘책’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계약서 작성과 관리, 외서를 출간하는 출판사의 주 거래처인 에이전시 미팅 및 외서 검토 업무, 번역가 섭외 및 진행,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교정교열, 일정 관리 등……. 특히 모든 에이전시 미팅에 나를 데려가 일일이 인사를 시켜주고 함께 미팅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참 감사하다.


에이전시와 출판사는 일을 하면서 메일로, 전화로 충분히 소통하기에 굳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첫 회사 이후에 알았다. 그럼에도 늘 모닝 옆자리에 신입인 나를 태우고 파주에서 강남까지, 두 시간 남짓 오가는 외근 길을 다녔던 걸 보면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던 편집장님의 배려가 크게 다가온다(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야 깨닫는 내리사랑…… 훌쩍).


어떤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에이전시 담당자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직접 보니, 같은 업계에서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일의 과정을 한눈에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에이전시와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출판사보다 한 발 먼저 소개받는 타이틀도 많았다. 미팅을 마치고 며칠 후면 상자 가득히 검토서가 택배로 도착하곤 했다. 이제는 전자원고가 그 무게를 거의 대신하며 많이 사라진 풍경이지만 말이다.


교정교열 업무와 이메일 업무에 엄격했던 편집장님도 떠오른다. 원고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문장 구조를 바로 잡고 오역을 없애는 일에 대해 엄격했던 선배들. 신입 시절에는 내가 3교까지 본 원고가 편집장님 책상 옆을 차지하고 내려올 줄 모르는 날들을 기다리는 게 너무 두려웠다. 아직 나는 턱없이 부족한가 보다, 눈치를 살피며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 기다리던 시간. 이 부족한 신입을 어떻게 가르쳐야 했을지 난감해했을 시간. 그럼에도 말보다 펜으로 표시된 손글씨로 따끔하게 가르쳐주던 편집장님(이렇게 떠올려보니 아직 저는 멀고 멀었네요).


이메일 쓰기는 일의 세계에서 말보다 정확하고 기록에 남는 중요한 업무였다. 작업을 의뢰하고 일정, 작업료 등 조율을 하는 모든 일이 그 안에서 벌어지니까. 때로는 무엇을 놓쳤는지 모르고 실수를 해도 번역가님과 작가님과 외주자분들은 너그러이 받아주시고 일에 능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셨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미팅 때마다 긴장한 상태로 나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앞에 있던 분들의 미소는 기억이 난다(...기억의 오류는 아닐 거야).


보통의 편집자들은 1을 넘어서 더욱 정갈한 언어를 씁니다만, 메일을 쓸 때만은 어쩐지 마음이 급해져버려 '할 말만 하자' 타입이 됩니다.


책 한 권 만드는 일은 알면 알수록 참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들어갔다. 출판 에이전시, 번역자, 그림작가, 외주 교정자, 디자이너, 제작부 담당자, 인쇄소 기장님, 물류 담당자 등. 파는 일까지 더하면 독자의 손에 쥐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을 거치는지. 책 한 권에 이토록 많은 이들의 노동값이 더해져 있는데…… 새삼 책값이 싸다. 각 과정마다 한 분씩 얼굴을 뵙고 잠시나마 일을 같이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누고. 그런 손들을 거쳐서 책을 한 권씩 만들었다.


서른이 되어 세 번째 직장에서는 인생 선배를 만났다. 다정함이 선배의 가장 큰 무기였다.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배려가 온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선배에게서 ‘일정 관리’를 배웠다.


수많은 사람의 수고가 담긴 책은 말하자면 매 달 론칭되는 신상품이다. 영업 담당자는 서점에 이 달 출간될 책을 미리 홍보하고 광고를 잡거나 매출을 계획한다. 그러니 계획대로 책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책을 만드는 세계는 매일이 변수다. 예정대로 원고가 들어오지 않는 건 다반사이고 이번 주에는 초교를 끝내기로 했는데 예상 외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거나 저자 원고 검토 일정이 좀 더 늦춰졌다거나, 외주자 일정이 하루 늦게 가능하다거나……. 그러다 책이 다음 달 출간으로 변경되면 이달의 매출은 그만큼 마이너스다.


이럴 때 편집자는? 자신의 일정을 무리해서 출간 일정을 맞추기 일쑤다. 4일은 필요했던 업무 시간을 3일로 줄이고, 주말에 자신이 일을 하고 월요일에 디자이너에게 수정을 맡기고, 마감 일정에 대해 저자, 역자, 외주자, 디자이너에게 수시로 알림을 하고.


책 한 권을 담당해도 일정 관리에 능숙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선배는 후배들 책까지 두루 살피며 일정을 관리했다. 자신의 일정과 달리, 팀원들 일정에는 무리하지 않도록 조율을 해주기도 했다. 이런 배려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전달이 되었으니, 돌이켜보면 선배는 혼자 힘들지 않았을까(그때의 내가 그 무게를 좀 덜어준 후배였다면 좋겠습니다. 흙흙).


팀원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건 참 쉬운 것 같다.

어려운 건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서로의 애씀을 살피고 현실 가능한 방안을 찾는 것이다.

묵묵히 뒤처리를 감당하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돌봐준 선배님들에게, 늦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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