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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Aug 07. 2020

[경고] BBㅣ,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10

몇 년 전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저자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시간 날 때 전화주세요."  


이모티콘도 없는 건조한 문자는 그 자체로 싸늘한 느낌을 한껏 준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책 작업을 진행하는 내내 편집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보다 본인의 요구사항을 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그였기에, 어느 정도 각오를 한다.     


곧이어 들려오는 싸한 목소리. 어제 외부로 보낸 홍보자료에 대한 불만이 약 10분간 귀가 따갑게 들려온다. 놀라서 흩어지려는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그가 원하는 것을 열심히 적는다. 이럴 땐 꼭 팀장님이 부재중이다. 수정해서 메일로 보내주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고요한 사무실, 내 통화 내용은 모두가 다 들었을 것이다. 부쩍 바쁘게 들리는 키보드 소리가 유독 크게 퍼지는 듯하다. 아침부터 새하얗게 타버리고, 홀로 씩씩거리며 화를 식힌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장 힘든 걸 꼽아보라면, 나는 편집자가 하는 일의 영역이 침해받을 때가 가장 힘들다.  편집자는 회사 바깥에 있는 저자의 의도와 의견을 가장 잘 이해하고 내부에 커뮤니케이션을 조율하는 사람이자, 무형의 글에서 책이라는 상품을 기획하고 유형으로 만들어내는 전문가이다.


물론 원고는 저자가 쓴다. 하지만 저자조차도 다시 보기 괴로워하는 초고를 일단 검토하느라 읽고, 출간 진행 결정이 나면 책이 나오기까지 대여섯 번을 더 꼼꼼히 샅샅이 읽는 사람은 편집자다. 자신의 글이라서 볼 수 없는 부분을 외부의 시선에서 확인하고 교정교열을 하고 사실 확인을 하며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사람이 편집자다.


편집자는 저자의 생각을 글로 만나는 독자들이 어떤 방해도 오해도 없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확하고 매끄러운 문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 독자가 읽으면서 떠올릴 질문들을 미리 앞서서 저자에게 물어보고 글만으로 모든 것이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편집자의 일이 힘든 이유가 나온다.

‘문제없이’.

문제가 생기면? 책과 관련해서는 어떤 영역이든 모든 게 편집자의 잘못이 된다.     


편집자는 책을 통해 만나는 완전무결한 텍스트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나 논리의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안테나를 세우며, 저자가 자신의 읽은 책 몇 페이지의 몇 줄을 인용했다면 그 책을 찾아 그대로 적은 것인지 확인하고 출판사에 연락해 2차 사용(원문 수록)에 대한 허락과 절차(주로 계약서가 오간다)를 밟는다. 오탈자 정도는 저자 – 편집자 – 디자이너 사이를 오가면서 원래 원고에 없던 것도 생기는 자연발생적(?)인 문제라 치더라도, 원고의 상황에 따라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예측 불가능하다.


그뿐인가. 원고를 읽고 재구성하고 책의 컨셉을 세우고 그에 따라 글의 제목과 부 제목을 바꾸고 저자에게 보완할 원고를 추가 집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원고 교정을 진행하는 동안 디자이너에게 본문 디자인(책을 펼쳤을 때 어떤 서체로 어떤 간격으로 한 페이지당 몇 줄이 위치할 것인가, 페이지 번호와 여백 등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과 표지 디자인(디자이너에게 표지 만들어주세요, 우리 책은 이런 내용이에요 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책이 표현해야 할 분위기, 디자인 아이디어, 색감, 저자의 캐릭터 등 적극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야, 디자이너의 원고 이해도가 더욱 높아진다)을 발주한다.


표지 시안이 나오면 편집부의 의논을 1차로 거치고 책을 판매할 마케터들과 저자와 공유하고 의견을 공유하며 조율하고 최종 표지를 선택한다.(아직 편집자가 하는 일은 많이 남았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할까).     


일련의 과정 속에서 편집자인 나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 저자가 강한 불만과 의구심을 품을 때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편집자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을 저자가 나서서 선을 넘어오는 경우 마음속 갈등이 생긴다.     


“표지는 내 주변에서 이게 제일 좋대요.”

“다 별로여서 손이 갈 만한 표지가 없다는데요.”     


단순한 사례이지만 이런 소통은 매우 어렵다. 이성적인 판단의 말이 아니어서 근거를 대기 어렵다. 이 경우에는 그럼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리도록 유도한다.


편집자는 저자 지인들이 가장 무섭다. 편집자들이 모이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책을 만드는 전문가는 믿지 않고 가까운 사람의 말들을 여과 없이 전달하면 거기서부터 일은 꼬이게 되어 있다(가끔 저자들이 다른 회사에서 내는 책의 표지를 보여주고 의견을 구할 때면 매우 조심스러워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자 지인’이라는 말로 명백히 제3자인 사람으로 괜한 의견을 전달하게 될까봐. 편집자 동료 여러분, 우리 서로서로 잘 부탁해요).


아이유 선생님이 그랬다. yellow CARD, 선 넘지 말라고.


가끔 적정선을 함부로 넘는 사람들을 만난다. 대부분 편집자와의 협업에 익숙하지 않아 편집자와 어떻게 관계를 두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때로는 모르는 게 죄다. 아무리 좋은 글을 쓴들, 독자들이 좋아한들 편집자를 괴롭히는 데 타고난 분들은 알게 된 이상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 편이다.


몇 년 전 통화는 보도자료에 쓴 줄거리를 봤는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시 수정해 써달라는 요청이었다(보도자료는 지면을 가진 매체 기자들을 위해 책을 소개하는 것이었던 예전 쓰임에 더해 요즘은 온라인서점 도서 상세소개 페이지를 위한 자료로 더 흔하게 독자와 만난다. 이마저도 글보다 이미지로 바뀌는 추세이다). 보도자료를 컨펌하는 저자는 이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다행히 연차가 쌓일수록, 정신적 충격은 덜하다(이런 것이 산전수전 겪었다에 해당되는 걸까). 처음에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을 상대에게 말도 길어지다가 굴욕적으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지만(저자 선생님은 정말 너무 어려운 존재였으므로), 그나마 나아진 건, 점점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상대는 선을 넘었고 나는 기분이 나쁘지만 하루의 컨디션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물론 후처리는 깔끔하게 신속하게 끝내버린다. 이런 일에 나의 자존심을 거는 건 낭비다.      


오늘의 파도를 넘은 것에 일단 안도하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걱정하기로 하자.

일단 잠은 두 다리 쭉 뻗고 자기로 한다.

일을 오래하기 위해서는 나만 손해인 일은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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