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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Aug 04. 2020

퇴사, 그 이후의 후유증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09

인정하겠다. ‘열심병’.

답도 없는 병에 걸려버렸다.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괴롭히는 병.

모든 책임이 다 내게 있는 것 같은 병.

지구를 업고 있는 듯 땅에 꺼질 듯한 병.

대체 누가 그런 걸 나에게 맡겼다고?


요즘 마음이 너무 불안하고 감정이 널을 뛴다. 바깥으로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왜일까.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환경에서, 왜 나는 자꾸 소녀 가장의 마음이 되는가. 이달 단행본 매출을 보며 없는 손톱을 물어뜯는 시늉을 하고, 자려고 누우면 자꾸 심장이 두근두근 터져나갈 듯 뛰며, 만나자는 작가님의 말에 어떤 이야기를 드려야 함께 작업할 수 있을지 부담감을 느끼고, 만나기 직전까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지. 왜 주말에도 헛된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는 압박을 느끼는지. 잘되어가는 프로젝트에도 빌딩과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줄을 걸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조마조마한 줄꾼의 마음이 되고 마는지.


이런 불안과 강박을 느끼는 걸 전 직장 동료인 언니에게 털어놓자, 바로 대꾸가 날아온다.     


“000(전 직장명) 병이야. 첫 책 나오기까지 나도 그랬어.”

“……에?”     


할 말을 잃었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바로 전 직장에서의 근속은 4년 6개월, 나의 출판 경력 중 가장 오래 다닌 회사. 닮고 싶지 않았지만 서서히 물들어버렸던 그곳. 매출로 매달 줄을 세우고 ‘매출이 인격’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곳. 매달 매출 목표를 채워도, 채우지 못해도 누구도 웃을 수 없었던 경직된 분위기. 아등바등 책을 내고 잠시 숨을 내쉬려고 하면 빨리 돌고 온 네가 한 바퀴 더 뛰고 오라고 등 떠밀어주던. 경쟁이 싫어서 출판사에 취직을 했던 내가 어리둥절했던 곳. 왜인지도 모른 채 하늘 높이 걸린 목표 매출을 보고 뛰고 있는데, 뒤에서 걷는 사람을 보면 원망하고 억울한 심정이 들던 곳.


그런 억울함에 사로잡히기 싫어서 미친 듯이 앞을 향해 질주하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지난 가을. 잠시 쉬었다가 올해 2월,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했다.

더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내가 그 회사에서 아마도 나의 출판 경력에 다시는 없을 판매부수를 기록한 그 성취감 비슷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도 계속 붙잡고 있었나 보다. 그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나왔으니 더 잘되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내 귓가에 JYP...매출... 너 이거 괜찮니...?)

아니 누가 대체 그런 걸 신경이나 쓴다니.


그토록 싫었는데 닮은 나를 보고 있자니 한심해서 자꾸만 숨고 싶다. 나를 가만두지 않는 나에게 시달리는 건 정말 괴롭다. 잘하고 있다는 격려의 말은 그냥 귓가를 스칠 뿐이고, 뒤돌아서서는 나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하진 않을지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하루를 쪼개고 뇌를 분산시켜 여러 엔진을 한꺼번에 돌리느라 공회전으로 에너지가 쑥쑥 닳아버린다.

나야, (멱살을 잡고) 어서 정신을 차려라.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란 곳이 그래서 중요하다. 숨쉬는 공기 속 미세먼지처럼 나도 모르게 보고 듣고 닮는다. 오래 버틸수록 떼어내기 힘들어진다. 입버릇처럼 내뱉는 한숨도, 일을 그르치면 자신보다 남 탓을 하는 버릇도,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달고 사는 사람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어느 순간 나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어디서 싫은소리가 들려오면서 소란할 때면 괜한 새가슴이 되는 것도... 너무 슬프다). 월급이 밀려 사장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나와야 했던 첫 직장 이후로, 매번 퇴사의 이유는 그곳에 있는 내가 정말 불행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책을 만들어도 책을 읽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는 사람이 유일한 마케터로 있어서 함께 일할 수 없어서 나왔고, 경직된 조직문화 속에서 위에서 던져주는 원고만 받아서 내야 하는 곳에서는 기획을 하고 싶어서 탈출했다. 매출에 쫓겨 책을 만드는 의미를, 오래 읽혀야 하는 책의 생명을 스스로 깎아내리기 싫었던 그곳을 힘들게 벗어나 놓고는 하루살이처럼 생존을 위해 무리한 일정을 반복하던 그때로,

자꾸만 그때 하던 대로 조바심을 내며 돌아가려는 나를

나는 오늘 기어코, 멈춰 세우고 만다.     


내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살기는 불가능하니까
그것들을 겪게 된다면, 특히 부정적인 경험을 했다면
데이터를 쌓았다고 하자.
패를 잃은 게 아니라 다음 선택들을 할 때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 <오은의 옹기종기>(2019년 8월 14일자 방송)에 출연한 김애란 작가님의 말 중에서


방송을 듣다 휴대폰에 메모해둔 문장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제 버전 5의 직장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몇 달 째 내 손으로 만든 책을 손에 쥐지 않아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기획을 하고 미팅을 한 지난 6개월간 계약 리스트를 잘 쌓아놓고는. 이제 다음 달이면 첫 책을 내고 기뻐서 누구보다도 팔짝팔짝 뛸 거면서. 내가 가진 경험은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는데. 불쑥 찾아오는 불안한 마음을 찬찬히 달래본다.


스스로를 향한 의심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쌓아가고 있는 다이어리의 기록을 믿자.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을 보자.

그렇게 또 하루를 시작해보자.

예상치 못한 퇴사 후유증을 참 길게 겪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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