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리 Jul 31. 2020

커피 마시러 출근하면 안 되나요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08

                                                    

누군가의 지휘라도 시작된 듯 베란다 밖으로 우렁차게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월요일을 앞두고 지난밤에는 자려고 누운 채로 이번 주에 해야 할 일, 월요일 회의 스케줄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이런 아침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까지 천근만근 팔 다리를 하나씩 조립하는 기분이 든다.


14년 동안 매일 아침 꼬박꼬박 출근이라는 걸 하고 있다.

'나에겐 빚이 있다. 일터로 가자.'

언젠가 본 표어를 가슴에 새기며 나를 달랜다. 발밑에서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의 평화로운 표정을 보면서.


도망을 갈 수 있다면 회사 방향 말고 공항이든 기차역이든 터미널이든 여기서 멀리, 다른 곳으로 향하고 싶은데. 해야만 하는 일과 해내야 하는 일들로 가득한 머리를 흔들며 잠을 쫓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 커피를 마시러 회사를 가자고 나를 설득한다. 아마도 14년째 커피 마시러 출근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어느 날의 커피들. 한숨을 덜고 답답함을 풀어주고 기운을 주던.




첫 직장이 있던 파주출판단지 시절. 셔틀버스에서 내려 회사 건물로 들어가기 전 길목을 지키고 있는 "더마켓"의 커피가 나를 지탱해주었다. 한결같이 살가운 사장님이 직접 만드는 샌드위치는 당연 최고였고, 종종 편집팀 회의를 하러 가기도 했던 그 시절 단골 카페. 지난겨울 끝 무렵 출판단지를 잠시 방문했을 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선배들과 함께 아마존 베스트셀러를 보며, 에이전시의 뉴스레터를 열심히 읽으며 국내에 소개해도 좋을 소설과 에세이를 찾았다. 위화, 쑤퉁 등 중국 소설이 소개되기 시작하던 시기였어서, 더마켓 카페를 떠올리면 선배들과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각자 읽은 소설을 이야기하며 영미소설과 다른 중화권 소설의 매력을 살펴보기도 했던 그날의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공덕역 부근으로 출근을 할 적에는 "티오피커피"를 이용했다. 공항철도를 타고 출근할 때라 회사 방향인 6호선 출구로 나가기까지 꽤 멀었는데, 굳이 5호선 출구까지 돌아서 나가야 있던 작은 카페였다. 5평 남짓한 공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멍하니 있기에 맞춤했다. 매일 보는 사장님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꾸준하게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었다. 두 손에 받은 라테의 온기에 출근길에 복잡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하루를 버텨낼 힘이 솟았다.


그 시절 회사 건물 바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새로 생긴 카페도 기억이 난다. 더 컴포트 커피.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카페여서 아침부터 회사 직원들로 북적였는데, 아슬아슬하게 출근해 공덕역 티오피를 건너뛴 날이면 9시 반쯤 느긋이 나가 커피를 주문했던 그 카페. 작은 공간에서 사장님 두 분이 시작한 카페는 빵도 맛있어서, 퇴사 후 몇 년이 지난 후 가보니 3배쯤 확장한 걸 보고 혼자 뿌듯해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던 귀여운 꼬마를 볼 수 있었다. 내가 퇴사를 하고 나서도 저 아이는 내일도, 내일모레도 여전히 장난감을 꼭 안고 씩씩하게 걷겠지 싶던. 그 카페에서 팀장님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처음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나를 열심히 잡아주던 팀장님은 지금도 좋은 선배로 곁에 있다.


바로 전 직장이 있던 상가 건물에는 카페가 많았는데 그중 탁월하게 맛있는 "터치 아프리카"를 나는 주로 드나들었다(주로 회사의 높은 분들과 마주치는 아침이었는데, 어쩌다 운 좋은 날엔 커피를 얻어 마실 때도 많았다). 손석희 사장님이 MBC 앵커 시절 자주 마시러 왔다는 그 카페에서는 매주 목요일에 카리스마 있는 카페 사장님이 직접 원두를 볶았다. 원두를 볶는 날에는 회사가 있는 6층 복도까지 원두 향이 퍼졌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갓 볶은 원두를 사러 내려가곤 했다.


온몸이 흐물흐물한 상태로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잠시 카페 밖의 초록초록한 공원을 바라보던 그 시간. 카페에서 동료들과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들. 생명수와 같은 커피를 받아 첫 모금을 마시면 눈이 번쩍 뜨이고 뇌에 비로소 신선한 피가 돌면서 하루를 살아낼 슈퍼 파워가 솟았다. 터치 아프리카는 집에서 가까워 퇴사한 후에도 종종 근처를 지날 때면 원두를 사러 들르곤 한다. 일산에 오시면 꼭 마셔보세요.


몸속에 카페인을 넣어야 비로소 업무 모드로 전환되는 나에게 매일 아침 맛있는 커피를 변함없이 내려준 무척 고마운 카페들. 퇴사를 하면서 그간 신세를 진 마음을 전하는 인사도 못하고 하루아침에 발길을 끊게 되기도 하지만, 퇴사 소식을 건네니 다음에 근처 오실 일 있으면 꼭 한 번 오셔라, 커피 한잔 대접하겠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잠시나마 마음 둘 곳이 되어준 지난 카페들에 무한 감사를 보내고 싶다.


매일 아침 내게 출근을 가능하게 하는 주문은 간단하다.

"일단 커피 마시러 가볼까."


작가의 이전글 다정한 기억에 기대어 오늘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