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18
올 것이 왔다.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과정 중에, 가장 고심하고 고뇌하는 시간. 독자에게 한눈에 매력을 어필하면서도 입에 착 붙을 그것. 한번 들어도 쉽게 잊히지 않고 기억할 그것. 이 원고를 쓴 작가님에게 “<0000000> 책을 쓰신 분이죠?” 라고 할 때 잘 어울려야 할 그것.
바로 제목 짓기.
누가 이 원고에 이름을 달아주기 전까지, 원고의 제목 옆에는 항상 ‘(가제)’를 달아둔다. 가제는 작가님이 원고를 보낼 때 달아둔 것일 수도 있고, 기획한 편집자가 지어둔 제목일 수 있다. 그 가제는 길게는 출간리스트에서 작가님이 마감해줄 날짜를 옆에 달고 존재하다가, 완전 원고(작가가 책에 들어갈 내용을 다 쓰고 편집자가 이제 되었습니다, 책 작업에 들어가지요 라고 합의한 상태의 원고)가 도착한 이후부터 초교, 재교, 삼교를 거칠 때까지 대략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 불리기도 한다.
내부에서만 임시로 불리는 프로젝트명 같은 것이지만, 보통 출판사에서 짓는 가제는 신경 써서 지어둔다. 회사 내부에서 첫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저희 00월에 나올 책이 있는데, 하며 운을 띄울 때 마케팅팀이든 디자이너든 동료 편집자든 솔깃할 만한 제목이 좋다) 가제의 암시라는 게 제목을 지을 때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목을 찾다 찾다 가제를 뛰어넘는 제목이 없어, 최종 제목이 될 때도 많기 때문에.
제목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제 마감하고, 내일 인쇄를 들어가는 이번 원고에 대해서 제목 결정 과정을 회고해보자. 브런치 연재 글로 시작한 이 원고의 제목은 1화가 올라왔을 때부터 출판 관계자들을 홀린 제목
<대문호를 꿈꾸던 연소득 480만원 예술가의 대부호 되기 프로젝트>.
이 긴 제목은 편집자에게로 와서 ‘대부호 프로젝트’(가제)가 되어 집필 기간을 거쳐 책 작업에 이르기까지 약 6개월간 그렇게 불렸다. 그리고 책 인쇄가 되기 한 달 전부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1주일 만에 제목이 정해졌다. 표지 의뢰가 들어가기 직전에.
다른 분야에 비해 에세이 제목은 정말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기억이 나는 제목들만 열거해봐도 느낌이 올 것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언어의 온도>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책 이게 뭐라고> 등등. 문장형부터 말하다 마는 느낌, 말을 거는 느낌, 혼잣말, 다짐형, 익숙한 리듬의 ‘00의 00’…….
제목안을 쓰기 위해서 새문서를 띄워 놓고 이 원고가 다른 에세이와 차별점을 가진 핵심 키워드를 뽑아본다.
#돈 그리고 #대부호.
키워드 밑에 떠오르는 제목을 적어본다.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을 정리하면서, 그에 따라 떠오르는 제목 후보들을 나열한다. 베스트셀러 제목 패러디부터 나름 유머를 담은 드립까지. 이 시간은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써볼수록 좋다. 뜻밖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데 생각의 울타리는 치지 말자.
#돈
1년이 지나고 많은 것이 변했다
돈 공부를 하며 깨달은 것들
대문호 전에 대부호 되기 프로젝트
나는 돈과 친해지기로 했다
돈 생각만 했을 뿐인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연소득 480만원에서 월소득 400만원으로
이제는 우리가 돈과 돈독해질 시간
모든 것은 은행 창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부호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일단은
대부호 프로젝트
연소득 480만원에서 시작한
대부호 프로젝트
텅장은 노, 가벼운 몸과 마음은 보너스
대부호 프로젝트
여기까지 뽑아두고 1차적으로 편집부와 회의를 했다. 기획 단계부터 원고를 함께 보고 의논했던 터라 회사 내에서는 담당 편집자 외에 원고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 책을 많이 사는 보편적 독자이기도 하다. 팀원들은 가제이자 작가님이 잡았던 컨셉 그대로인 ‘연소득 480만원에서 시작한 대부호 프로젝트’를 꼽았다. 여기서 담당 편집자인 나는 제동을 걸었다.
"여러분 이 책이 놓일 매대를 떠올려보세요.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에세이 매대입니다."
처음에는 금액이 정확히 적힌 제목을 꼽던 팀원들이 고심 끝에 다시 고른 의견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일단은 대부호 프로젝트’.
그리고 나의 상사님이 등판했다.
“대부호를 제목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대문호’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대문호 대신 대부호 되기 프로젝트. 길어도 이렇게 같이 있어야 우리가 느낀 그 재미를 독자들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너무 길어 보이는 건, 입에 안 붙는 건 어떻게 해결하지? 다시 고민. 회사 밖 동료 편집자들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대부호”라는 단어가 낯설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문호”와 “대부호”가 같이 있는 경우에는, 둘 다 되기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다는 의견까지(제목회의를 할 때에는 이렇게 즉시 드는 느낌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는 게 가장 도움이 된다. 원고와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견을 구해보는 것도 낯설게 보는 시선이 독자들이 느낄 그 지점이기에).
한편 회사 밖 20대 후반 30대 초반, 마케터, 홍보부 등 다른 나이대, 다른 부서의 후배들은 '대부호 프로젝트'로 의견을 모아줬다. 한 단어를 두고도 여러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게 제목의 묘미이자 어려움이다.
나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들어갔다. 가장 매력적인 첫 느낌은 ‘대부호’가 갖고 있었는데 이걸 버리자니…… 괜찮을까. 그럼에도 “부자”보다 많이 쓰이지 않는, 문학적 표현인 “대부호”는 일단 내려놓는 게 맞았다. 다만 카피로 가자. 그리고 제목은 에세이 독자들을 생각하고 부드럽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렇게 나온 다음 제목안들.
오늘이 불안하지 않고, 내일이 두렵지 않게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일단은
오늘이 불안하지 않고, 내일이 두렵지 않게
나는 나를 바꾸기로 했다
새로운 내가 차곡차곡 쌓이는 중입니다
여기까지 뽑아두고 마케팅팀과 공유했다. 에세이 독자들이 거부감이 없게 책을 펼쳐볼 수 있는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차별화 지점을 잘 부각시키면서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제목,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보이는 제목을 찾아야 했다. 물러설 수 없는 마감 시간은 오고 있다(책 표지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물리적 시간을 양보할 수 없는 작업이다). 편집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일단은
대부호 프로젝트
오늘이 불안하지 않고, 내일이 두렵지 않게
내 인생의 핸들은 내가 꺾는 방향으로
아닌 제목들을 과감히 털고, 작가님께 메일로 최종 제목안 2개를 드렸다. 제목을 둘러싼 고민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작가님의 원고를 대여섯 번 이상 읽은 편집자로서 느끼는 솔직한 감상평과 함께.
대부호 프로젝트를 제목으로 갈 때에 장단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에세이 분야에서 보기 드문 제목이어서 낯설고 신선하거나, 혹은 일상적이지 않아 어려워 보인다는 호불호요.
(이런 의견으로는 '대문호'가 붙으면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피드백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호기심을 끌고 명확한 컨셉이 보이는 단어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 에세이 시장에 좀더 밀착된 제목으로 새로 잡아본 에세이형 문장 제목을 드려보아요.
'돈'이 직접적으로 제목이나 부제에 들어가면 거부감을 보이는 에세이 독자층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아무래도 손이 덜 가고 외면을 받게 되네요 ㅠ 지하철에서 꺼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게),
"경제적 자유"라는 말을 풀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일단은' 이라는 부제를
제목으로 가도 좋겠다는 의견도 있어 공유드려요.
또 작가님 에세이를 읽으면서 결국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게 된 나만의 생존 무기를 장착하게 되면서,
이렇게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와 시간을 얻게 된 것에 감탄을 하며,
부제를 "오늘이 불안하지 않고, 내일이 두렵지 않게"로 뽑아보았습니다.
결국 작은 습관을 하나씩 붙여가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지요. :)
작가님께도 이런 고민을 담아 의논을 드려봅니다.
제목과 부제에 따라 띠지 문구는 추후 또 고민을 하고 다듬어볼게요!
그럼 검토해보시고 연락주세요.^^
하룻밤이 지나고 작가님께 카톡이 왔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이 제목이었다.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고 에세이 독자들에게 재미도 주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경쾌한 제목.
일주일간 끙끙 앓던 고민으로부터 단숨에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한방에 영감으로 오는 제목은 잘 믿지 않는다. 단계별 고민을 거듭하면서 차근히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닿는 운명적인 제목이 있을 뿐.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원고를 읽고 또 읽고. 그리고 원고를 보지 않은, 작가님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생 눈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는다(출판계에서 선호하는 제목과 비출판계 친구들이 선호하는 제목에도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내가 낸 제목안을 꼭 관철시키고 말겠다는 고집 없이, 이 책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좋은 제목에 대해 얼마든지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전부일 뿐.
이제 독자들의 손에 경쾌하게 귀엽게 다가갈 일만 남은 것 같다.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려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