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04
며칠째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당신의 처지가 어떤지, 오늘 몸의 상태와 기분이 어떤지 자꾸만 생각이 당신에게로 달아나 그런가 봅니다. 당신의 용기 있는 발언을 통해 사건의 추악한 면들이 전면에 드러나고, 그걸 비판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명백히 갈리고 있으니 우습기도 신기하기도 합니다. 요 며칠 동안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며 저의 신입시절부터 지금까지, 책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작은 자부심으로 버텨온 날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부당한 상황에서 도망갈 수조차 없었던 신입사원
처음 출판사에 입사한 날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 바닥 좁다"였습니다. 좁은 출판 바닥에서 말은 빨리 돌고 또 돕니다. 그래서 신입으로 입사한 경우, 종종 "너 여기 나가서 다른 데 못 갈 줄 알아." 하는 사장의 말에 지레 겁먹기도 합니다. 자신과 친한 회사 사장들에게 전화를 돌린다는 유치한 협박이었죠. 당신도 들어본 적 있었을까요?
저도 그런 말에 겁을 먹었습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입사한 저를, 출판사의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 작가 작업실로 파견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하면 된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이 돈으로 사라며 '여'사장님이 건넨 50만원을 받았습니다. 지금이었으면 "저는 이런 일을 하려고 회사에 지원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시엔 주워듣던 말들이 ‘신입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한다’, ‘일단 버텨라’ 하는 것이었으니 가만히 있었습니다. 막 편집자로서, 사회인으로서 발을 내딛는 출발이었으니 사장님의 지시가 싫다고 뛰쳐나가는 일, 그런 선택을 쉽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의 일은 단순했습니다. 작업실로 9시까지 출근했지만 딱히 하는 일은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손님이 오면 차를 내오고, 선생님이 시킨 다른 출판사 일도 좀 봐주고, 식사 때가 되면 선생님과 먹을 점심을 사옵니다. 가끔 미국에 있는 선생님 아들 숙제도 하고, 아들 학교 행사 준비에 연락을 돌리고 장소를 알아봤습니다. 오후 6시쯤 선생님은 그때부터 저희 회사에서 출판할 책을 작업했습니다. 퇴근시간이지만 본격적인 일의 시작이었고, 편집장님이나 사장님도 간간이 들렀습니다. 일은 보통 11시쯤 끝이 났고, 밤늦게까지 이어져 디자인실장님과 작업실 옆방에서 잔 적도 있었습니다.
입사 직후 회사 책상에 앉기보다 작업실로의 출근, 사장님이 붙여놓은 작가 감시자 겸 비서 역할이 제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책은 언제 만드나, 편집은 언제 배우지 하는 걱정으로 한 달쯤 버텼을까요. 거의 포기할 즈음 회사로 복귀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주변에 의논할 때마다 ‘무슨 일을 시키든지 1년만 버티고 이직해라’, ‘경력만 더 쌓이면 어디든 간다’ 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다섯 신입이었던 저는 선생님이 옆에 앉으라면 앉고, 어깨에 손을 올려도, 제 손을 함부로 잡고 주물럭거려도, 소름이 끼치도록 싫은데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 선생님도 늘 말했습니다.
"나를 거쳐간 사람들은 다 훌륭한 편집자가 되었다."
그렇게 침묵과 인내의 시간이 지나 사무실로 다시 출근했을 때, 선배들은 그저 수고 많았다,고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때 편집장님과 팀 선배님들의 묵인이 참 밉기도 합니다.
‘을’ 중의 ‘을’, 여성 출판 노동자의 그 흔한 ‘저자 접대’
출판업계라서 특수한 업무환경이 있다면, 당신의 인터뷰에서 파장을 몰고 온 '저자 접대'가 생소한 말일까요? 앞서 작가 작업실로 파견된 것처럼 출판사는 저자와의 관계 또는 저자 관리를 매우 중시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젊은 여성'을 필요로 하는 분위기는 한국 사회 어느 회사든 마찬가지 같습니다. 출판사 사람들, 특히 사장 및 편집자들은 술자리가 많습니다. 작가 모신다고 자리를 마련해 한잔, 책을 계약했다고 한잔, 책이 출간되어 한잔,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 수고했다고 한잔합니다.
물론 술자리가 다 이상한 건 아닙니다. 작가들과의 대화는 뜻밖의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술자리에 앉는 자리부터 배려를 해주고, 술은 자유롭게 마실 사람만 마시고, 글과 책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나눌 수도 있는 자리는 기억에 오래 남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술'이기에 (가해자의 입장에서 변명하는) 실수도 자주 일어납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스킨십을 당할 수도 있고, 불쾌한 음담패설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특히 편집자를 자신의 조수쯤으로 아는 저자들이나 부하직원과 친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퇴근 후 단 둘이 술 먹자는 얘기를 쉽게 꺼내는 남성 상사들은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는 기피 대상입니다.
어떤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며 내 맘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는 일, 온몸에 긴장을 하는 일을 남성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술자리를 주의하라고 선배에게 들었다면 행운이지만, 네가 너무 유난스럽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행을 바꿔보고자, 제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노조를 통해, 저자와의 술자리는 편집자에게는 '업무'인 것으로 연장근로수당을 요구도 해봤지만(그러면 좀 줄어들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회사는 '업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만남쯤으로 격하시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노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견뎌야 하는 시간(그림자 노동이자 감정 노동)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 걸까요?)
출판사의 일은 대부분 '관계'가 중시되는 일입니다. 한마디 말로도 저자와 등을 돌릴 수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저자를 만날 때면 호감을 사야 하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해갈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편집자는 철저한 '을'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특히 윗선들이 많은 사원일수록 발언권도 없고 스스로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나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면 안 되는데, 일에 대한 책임이 심리적으로 압박해옵니다.
회사는 회사, 사장의 왕국일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
출판사는 중소기업 청년인턴제를 통해 인턴 기간(6개월) 동안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습니다. 이에 신입을 인턴으로 대체하고 그 기간이 끝난 후에 정식 고용을 하지 않는 출판사도 있습니다. 바쁠 때만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쓰고 마는 거죠. 책을 만들고 파는 출판사는 대부분 여성 직원들이 반 이상입니다. 다른 업계보다 여성 사장님들이 많기도 하고요. 글을 쓰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작가들과 함께 일합니다. 독자들이 보기에 회사 분위기와 업무 환경들이 다를 거라 오해할 만합니다. 당신도 나도 시작에, 그런 기대를 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대에서 바닥까지,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그러나 현실은 여성을 위한 출산휴가 및 복지휴가가 있는 출판사가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의 보통 간부급 자리는 남성들이 앉아 있습니다.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결혼을 앞두거나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이 각자 버텨야 하는 건 마찬가지랍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임신이라는 이유로 퇴사를 강요받은 후배의 소식도 들은 적이 있고요. 이런 부당한 이야기들은 업계 사람들 서넛만 모여도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규모가 작아서, 사장 개인 회사라서, 출판업계는 더욱 싸우기 힘듭니다. 부당해고, 부당한 인사발령 등 노동법을 위반하는 일들이 밖으로 알려지기가 어렵습니다. 회사 안의 모든 구성원들은 사장의 권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나마 오랜 준비 끝에 출판노조협의회가 올해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출판사들의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 천만다행입니다.
행복한 노동으로 책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의 이야기 이후로, 편집자들을 위한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에 수많은 사연이 도착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네 잘못이 아냐, 들어줄게. 얘기해봐, 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마치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어쩌면 저마다의 몫으로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침묵으로 견디고 있던 우리가 바닥을 차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으로 성을 착취하는 일은 인권을 유린하는 죄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그 피해에 대한 보상과 다른 여성 출판 노동자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한 회사의 노력은 필수적입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갑을 관계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갑을 관계가 더해져, 여성 출판 노동자들은 숨이 막힙니다. 배움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책을 만들고 파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우리들은 행복한 노동으로 행복한 책을 만들기를 꿈꿉니다.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는 당신, 나는 당신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만, 당신이 하나씩 풀어놓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짓눌리는 아픔을 느낍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민낯을 드러냈으니 이제 바꿀 일만 남았습니다. 당신의 용기 그 위에 수많은 용기가 더해져 많은 출판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작은 발걸음을 내딛기를 희망해봅니다. 함께하겠습니다.
*2014년에 '혐의 없음'으로 사건 종료된 출판 노동자이자 피해자를 위해 연대하기 위해 매체에 기고한 글을 다시 꺼내어보았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오랜만에 꺼내본 글에 비친 오늘이 여전히 멀고 멀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굴하지 않겠습니다. 이 분노를 동력으로 계속해서 연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