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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Jul 21. 2020

매일 잘할 수 없는 게 일의 세계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05


베란다 창밖을 보는데 연둣빛 나뭇잎들이 가득하다. 아파트 단지 끝에 마주한 우리 집과 도로 사이에는 스무 살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나무가 있다. 3년 전 막 이사를 왔을 때만 해도, 7층인 우리집 아래로 나무정수리가 내려다 보였는데…… 어느새 우리 집 천장만큼 높이 올라왔다. 거리에서 보면 그저 큰 나무라서, 더 클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는데. 인간의 상상 따위 아랑곳없이 까치 둥지를 품고도, 비가 대책 없이 쏟아져도, 강풍에 잔가지가 부러져도, 추웠다 더웠다 계절이 바뀌어도, 나무는 그 자리에서 꼿꼿이 버티고 서서 조금씩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눈앞의 가장 큰 나무가 아랫집 높이까지 올라왔던 나무다. 3년 사이에 대략 2미터가 훌쩍 자랐다.


오늘은 첫 출근일로부터 만 13년이 지난 아침이다. 창밖의 나무처럼 나도 아무도 모르게 자라왔을까.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소속이 바뀌던 그날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집을 나섰을까.


어쨌거나 이모 집 화정에서 파주출판단지까지는 버스를 하나 타고 백석으로 넘어와 200번 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버스 시간이 어긋나는 바람에(2007년…… 그래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다) 첫날부터 요란하게 30분이나 늦어버렸다.

그리고 옆 선배의 소설책이 출간되는데 영어로 된 인터뷰를 번역해달라는 업무가 나의 첫 업무였다(이런 걸 편집자가 하는 걸까…… 나를 테스트하는 걸까…… 등 뒤로 진땀을 한바가지 흘렸던 것 같다).

점심에는 편집부 다 같이 해물뚝배기를 먹으러 갔었고, 미어캣처럼 하루 종일 사무실 내 어디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귀를 쫑긋거리며 온몸에 긴장을 했었다.


마침내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이모부와 이모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나는 눈물을 뚝 흘리고 말았다.


회사가 너무 조용하다고, 나에게 별 관심이 없고 말도 걸어주지 않는다고…….


그때 이모부와 이모는 무척 당황했고 나를 잘 달래주었다. 회사란 원래 그런 거야. 다들 바쁜데 어떻게 신입을 다 챙기겠어 하고. 지금 돌아보면 어디 동아리를 들어간 새내기도 아닌데, 따스한 환대를 바랐던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의 마음이었다.


출판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마음 속으로는 출판 정년으로 막연히 마흔을 바라봤다. 이 업계는 마흔이 정년이라는 이야기들을 주워 들은 탓이었다. 100권쯤 만들면 베테랑이 되어 나의 출판사를 창업해도 될까.


시작과 동시에 끝을 바라봤지만 그렇다고 마냥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출판계에 입문하자마자 혼자 모든 걸 다 하기 위한 준비를 동시에 시작했다. 영업이든 제작이든 디자인이든 책을 만드는 과정과 독자에게 도착하기까지의 일들은 모두 다 알고 싶었다. 편집부 선배들만 따르기보다 두루 쫓아다니며 궁금한 걸 물어보고 출판계 모임에도 참여하며 구체적으로 내가 사장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길 좋아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세계에 갇힌 채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협업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입장만 되풀이해 말하는 편집자가 되지 않았다(참 다행이다). 그리고 지금은…… 마흔이 되기까지 2년이 남았다(눈물 좀 닦을까).


돌이켜보니 마흔이라는 심리적 경계선만 바라보느라 정작 책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던 것 같다. 다만 요즘 들어 누군가에게 책을 내보겠냐고 제안하는 일에 대한 묵직한 책임을 느낀다.


유명한 모든 사람들이 책을 내지는 않는다.

책을 내는 사람은 오래된 매체인 ‘책’을 통해서 독자들의 신뢰를 얻는다.

책을 출간한 사람에 대한 신뢰는 출간한 출판사가 아무에게나 책을 쓰게 하지 않는다는 신뢰까지 더해서 부풀어지기 쉽다.

그러한 신뢰는 각종 매체나 도서관에서 소위 어떤 분야에서 믿고 불러도 좋을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책을 내자는 제안은 일종의 권위와 신뢰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조금은 신중해져도 좋지 않을까, 독자 곁에 서 있는 1차적 게이트키퍼로서 최소한의 윤리의식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으로의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좋은 책을 내기 위한 마음을 다잡아본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더욱이 아침이라 몸이 뻣뻣하다고 느껴진다면 여기에서 멈춰도 괜찮아요. 내 유연성이 허락한다면 종아리를 잡고 가슴 쪽으로 조금 더 당깁니다. 중요한 건 근육을 많이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호흡을 느끼면서 수련하는 거예요. 어제는 잘 되던 게 오늘은 안 될 수도 오늘은 잘 되던 게 또 내일은 안 될 수 있어요.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 스스로의 수련을 만들어 가보세요.”


아침마다 만나는 영상 속 요가 선생님(유튜버 요가은)이 다정한 말을 건넨다. 뻐근한 목과 어깨, 허리를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하는데 귀에 쏙 꽂힌 말이다.


맞다. 매일 잘할 수 없는 게 일의 세계이고, 나의 기대에 맞춰 모든 사람이 일정대로 기대만큼 움직일 수 없는 게 책을 만드는 일이다.

그저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다시 8시간 근무를 하기 위해 내 몸을 아프지 않게 돌보는 정도로도 내 몫은 충분하다. 아니 그게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


일을 앞세우지 않기.

자신을 돌보는 걸 미루지 않기.


마흔 이후로도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편집이라는, 책을 만드는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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