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위로, 그리고 다짐" – 환자가 건넨 2만 원과 간호사의 깨달음
그날은 유독 더 바쁜 날이었다. 신규 간호사로 병원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독립(혼자서 환자를 돌봄)을 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직 서툴고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 가득했다.
내 일도 벅찬데, 곧 교대할 간호사 선생님께 인수인계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초조하고 불안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긴장한 탓에 손은 꼬이고 발도 꼬였다.
저녁도 거른 채,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냉수만 들이켜며 일에 몰두했다. 병실 복도를 빠르게 지나가던 중, 환자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보였다. 바로 ‘꽃 모자’였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꽃이 풍성하게 달린 모자는 너무도 특별했고, 내 환자분이 그 모자를 쓰고 폴대를 끌며 병실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그냥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나는 환자분께 다가갔다.
“할머니, 모자가 참 예뻐요.”
“그래?”
“네. 오늘 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는데, 할머니 모자 보고 처음으로 웃었어요.”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모자가 특이하지? 이거 북한산 가서 산 모자야.”
“정말요? 역시 평범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래? 내 친구들도 다 어디서 샀냐고 묻더라. 내가 웃긴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일도 많고, 인수인계 시간도 가까워졌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내가 친구들이랑 계모임으로 북한산에 갔어. 정상에 가니까 이걸 딱 파는 거야. 얼마냐고 물었더니 3만 원이래. 너무 비싸서, 내가 또 한국 사람이잖아? 바로 깎았지. 그래서 2만 원에 샀어.”
“우와, 만 원이나 깎으셨네요? 대단하세요!”
“그러니까 말이야! 모자를 쓰고 관광버스에 올라탔는데, 글쎄 할망구들이 다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자랑스럽게 ‘난 2만 원에 샀다!’ 했더니, 걔들이 단체로 샀다고 5천 원에 샀다는 거 있지?”
“아이고야… 하하하!”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내겐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업무에 집중했다. 이상하게도 아까 크게 웃은 덕분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놓쳤던 부분들도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OO 선생님, 선생님 환자분이 찾으세요.”
일에 집중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던 환자분의 부름이었다. 돌아보니, 아까 그 꽃 모자를 쓴 할머니가 서 계셨다. 그리고 내 손에 돈을 쥐여주셨다.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걸 왜 주세요?”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아까… 웃어줘서 고맙다고.”
“저는 좋아서 웃은 건데, 왜 돈을 주셔요? 안 주셔도 돼요.”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통닭 사 먹어. 이 나이 먹고 병원에 들어와 보니, 자식들이 살뜰히 챙겨줄 것도 없고, 영감 죽고 나서 줄곧 혼자 집에서 지냈어. 외로웠지. 근데 간호사가 내 이야기에 그렇게 크게 웃어주는데… 그게 너무 고맙더라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저 웃어드린 것뿐인데, 그조차도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 외롭게 지내셨을 그녀의 시간이 한순간 내 마음으로 밀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간호사야, 울지 마라. 사는 게 뭐 별거 있나. 힘들었지? 바빠 보여서 내가 말 걸까 말까 하다가 그냥 했데이. 일 끝나면 통닭 사 먹고,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쉬어라.”
꽃 모자를 쓴 할머니는 폴대를 끌고 병실로 돌아갔다. 그 순간을 모르는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은 내가 울고 있는 걸 보고 놀라며 휴지를 내밀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나, 정말 환자분들께 잘해야겠다. 내가 받은 게 너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