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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참 예뻤었어”

치매도 잊지 못한 마지막 사랑.

by 별빛간호사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퇴근 후 책상 앞에 앉아,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쓸까 한참을 고민했다.
수많은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오늘 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떠오르는 한 분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그 환자분은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끔 생각이 난다.
입원 기간이 거의 1년 가까이 되었던, 오래 머물렀던 분이셨다.

처음 입원하셨을 때, 이미 다리에 힘이 거의 없으셨다.
그런데도 계속 걷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잠시 다른 환자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할아버지는 혼자서 일어나 걷다가 여러 번 넘어지곤 하셨다.

눈가와 뺨 주변엔 자주 멍이 들었고, 그 멍은 마치 고집스러움의 훈장처럼 앉아 있었다.

tempImageMHRHh2.heic 눈 주변에는 항상 이런 멍이 있었다.

나는 출근할 때마다, 할아버지께 눈도장을 찍듯 인사를 드렸다.
왜 그렇게 더 정이 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오랫동안 병동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인사에 할아버지는 말없이 손을 흔들며 화답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주시던 단단하고 조용한 사랑이 좋았던 것 같다.

가끔은 데이 근무 중 배가 너무 고파서,
“할아버지, 너무 배고프고… 일이 너무 힘들어요.”

tempImageA07M40.heic 배고픈 간호사...


툭 던지듯 말을 꺼내곤 했다.

그럼 표정 하나 없던 할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배고파? 밥 먹어.”

“먹을 게 없어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할아버지는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집에 가. ○○○ 할아버지가 밥 주리라고 해. 밥 달라고 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할아버지에게 나는 그저 동네에 사는 배고픈 아이였나 보다.

“네, 그럼 가서 얻어먹고 올게요.”

할아버지는 그제야 안심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그 따뜻한 관심이 고맙고 좋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할아버지와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 아랫집 동생.”
“연애도 하셨어요?”
(고개만 끄덕)
“할머니 예뻤어요?”
(고개 도리도리)
“에이~ 그래도 예쁘다고 해줘야죠.”
(다시 도리도리)
“그래도… 사랑하셨죠?”
(고개 끄덕끄덕)

그렇게 나는 돌아서려던 찰나,
뒤에서 들린 할아버지의 작은 목소리.

“마음이 참… 예뻤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조용히 떨렸다.
나는 따님에게서, 할머니는 10년 전쯤 사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어느 날은 나를 중국 여자라며 욕하셨고, 다음 날은 딸이 왔다며 반겨주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 마음속에는 여전히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치매도… 사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걸까.

그 깊은 기억 속, 따뜻한 마음 속에서
할머니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렇게 따뜻하게 남겨질 수 있을까?

지금쯤, 그분은 할머니를 다시 만나셨을까.
그곳에서는 마음껏 걷고, 아프지 말고, 두 분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시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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