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암, 편마암 그리고 현무암
우리나라 산성의 나라라 한다. 남한 지역에만 무려 1,200여 개의 산성이 남아 있다. 산성은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장소이자 답사코스이다. 평지의 문화유적은 부풀려져 관광지화 됐지만, 산성은 아직 상업화되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다. 일단 산에 올라가야 하고 복원에도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식상한 관광지를 피하는 답사자의 증가와 새로운 문화유적을 개발하고자 하는 자치단체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산성 답사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생각된다.
이덕일 등은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에서 17개의 산성을 소개하였는데 그 첫 번째는 남한산성이다. 그만큼 의미 있는 곳이란 이야기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하남(면적:47%), 광주(45%), 성남(8%)에 걸쳐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사적 제57호이다.
신라시대 주장성(晝長城)
주장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672년(문무왕 12)에 쌓았으며 주위가 4,360보(8km) 정도 됐다고 한다)로 한양도성(18.6km)보다 약간 적다. 당시 최대의 산성이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과 함께 한성 백제의 방어선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주장성은 668년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당이 약속을 깨고 한반도에 군침을 흘리던 시기인 672년에 축성한 성이다. 보은에 ‘삼년산성’이라는 성이 있는데 이름처럼 축성에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남한산성은 불과 1년이 걸렸다고 한다. 게다가 주장성을 쌓은 화강암은 그 분포지역이 남한산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아차산 지역으로 최소 11km 이상의 먼 지역에서 가져왔던 듯하다. 지금이라면 트럭에 싣고 왔겠지만, 암석을 캐고 달구지에 싣고 산을 오르는 수고를 생각하면 거의 피라미드 만드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피라미드는 바로 앞에 있는 석회암을 떠내기만 하면 됐으니 오히려 쉬웠으리라. 그 당시의 운송 수단, 축성 주체의 기술과 재정이 대단하다.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주변을 파헤쳐 편마암으로 성을 보강했을 뿐이다. 화강암과 편마암은 축성 재료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른 재료이다.
남한산성
현재 남한산성은 전체 11.7km(본성 9km, 외성 2.71km)로 5개의 옹성과 4개 대문이 있다.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조, 정조기에 여러 축성 기법으로 보강하여 결과적으로 발전하는 축성기법이 잘 남아 있는 교과서 같은 산성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여장(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총을 쏘는 담)이 모든 구간에 걸쳐 있는 유일한 산성이다.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이 있다. 산성의 축성에는 승군이 동원되었고 8도에서 소집된 승군이 주둔하던 8개의 사찰과 지휘 사찰인 개원사 등 10개의 사찰이 산성 내에 있었으니 당시에는 작은 불국토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남한산성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명나라 황제만이 진정한 군주라고 주장한 반정의 딜레마 속에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여 병자년 스스로 수모를 겪고 백성을 괴롭게 만든 이야기가 더께처럼 얹혀 있다. 정권 찬탈에는 목숨을 걸어도 외침에 목숨을 걸 수 없는 그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책에 넘긴다. 후손들은 이 장소를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축성술
시대별로 축성 기술이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신라시대, 조선 인조, 숙종, 영조, 정조 때 축성기법이 다르다. 신라시대에는 옥수수 알갱이처럼 둥그스름한 화강암을 축구공 크기만 하게 잘라 사용하였다. 남문에서 서문 주변에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포천이나 문경 등지에서 운반해 사용했을 것’으로 주장하는데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 동문 쪽 성벽은 돌이 훨씬 크고 모양이 사각형이다. 성벽의 기울기는 수직에 가까우나 두께는 얇아졌다.
인조 16년부터 정조 때까지 150년간 간헐적으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5개의 옹성과 외성이 만들어진 것이 이 시기이다. 인조는 청나라군이 망월봉에서 쏘아 대던 장거리포인 홍이포에 혼비백산했다. 홍이(紅夷)는 얼굴이 붉은 네덜란드 사람을 의미하고 이들이 명나라에 만들어 팔았던 것을 청나라가 빼앗아 명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믿던 조선까지 끌고 와서 쏘아 댔다. 이제 성안에만 웅크리고 있다고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았고 성벽은 홍이포에 간단히 부서져 나갔다. 후에 전략상으로 중요한 망월봉 등에 옹성과 포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숙종 때는 겉면을 이루는 면석의 크기도 늘렸다. 하나의 무게가 400~900kg에 이르는 큰 돌을 사용하였고 성돌의 뒤뿌리가 최소한 60cm 이상 되도록 하여 충격에 쉽게 붕괴하지 않게 하였다. 정조 때에는 전돌과 석회를 사용하여 여장을 새로 쌓았다.
편마암 지역에 왜 화강암 산성이 있을까
남한산이 있는 지역은 선캠브라이가 호상흑운모편마암 지역이다(둔전 도폭). 서문에서 남문으로 가다 보면 산중에 아래와 같은 편마암 전석을 발견하게 된다. 백색 부분과 검은 부분이 교대로 나타나는 편마암인데 심지어 심하게 변형된 습곡의 모습도 보인다. 이런 바위는 아무리 실력이 좋은 석공이라도 반듯하게 다듬기 힘들다. 조각조각 떨어져 나오게 된다. 암석의 결이 일정하지 않아 성벽이 받는 응력이 골고루 작용하기 힘들어 성벽이 틀어지기 쉽다. 그리고 검은 부분을 이루는 광물(흑운모 등)은 쉽게 풍화되어 전체 암석이 힘을 받기 어렵다. 일부 편리가 없는 편마암이 있어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조선 후기에 복원된 부분에는 이런 편마암으로 만든 성체의 돌이 많이 보인다. 특히 외성에는 전부 편마암을 사용하였다(박상구 외, 2017).
그렇다면 처음 주장성의 축성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남아 있는 유물에 추측을 더해 살펴보면 이렇다. 지정학적으로 남한산성의 위치는 탁월하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반드시 산성을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주변의 암석이 부실하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암석을 가져오면 된다. 지형으로 보아 남한산성은 북쪽으로는 송파 벌판이 있어 강북까지 넓은 평지가 이어진다. 더 북쪽으로는 한강이 가로막고 있다. 이 말은 암석을 가져올 곳이 없다는 이야기다.
남한산성은 주장성의 옛터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옛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어렵고 옛 부재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연주봉 옹성치 부근에서 발견된 옥수수알 모양의 돌은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모양을 보인다(심광주, 2011).
가장 가까운 화강암 지역은 한강 북쪽에 아차산인데 직선거리로 11km가 넘는다. 화강암을 유난히 잘 다뤘던 신라인이라면 화강암을 선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우백질 화강암만이 산출(조영훈 외, 2015)되니 주장성 시료를 비교하면 대상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석재는 그 채석 과정과 운반과정에 많은 노동이 들어가고 심지어는 사상자가 나오기 쉽다. 주장성의 전체적인 화강암 사용량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작은 양이라도 사용하려면 빈틈없는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특히 주장성은 1년 만에 구축되었다(심광주, 2011)고 하니 당시 신라로서는 국운을 건 최대의 토목사업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한양도성의 경우 시대에 따라 원거리의 채석장을 이용하는 경우를 알 수 있어 태조 5년부터 숙종 8년까지는 도성 5리 내외의 석산을 이용하였으나 영조 24년부터는 12km 이상 떨어진 노원에서만 석재를 채석하여 이용하였다(조영훈 외, 2015). 남한산성의 구체적인 암석 산지의 특정을 규명하기 위해 암석학적 분석, 대자율 측정 등 다각적인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른 유물과는 달리 산성은 대규모 토목공사이고 돌을 쌓는 과정이 필수적이므로 복원하기 전에 역사적인 고증과 지질학적인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구조나 재질로 쌓으면 수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로 복원할 것인가 역시 비전문가가 할 일이 아니고 아무 돌이나 쌓는다고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남한산성의 복원작업이 내외로 한창이다. 행궁의 복원이 이루어졌고 각종 시설의 발굴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이다. 왕이 다니는 문으로 4대 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들어왔던 문이다. 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복원해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쪽 홍예문 좌우 측에 검은색 현무암이 보이는데 어떤 근거로 이 돌을 사용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산성에서 암석은 산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정보이다. 따라서 복원될 시점에 사용하던 암석 종류를 사용해야 한다. 산성이 돌을 전국에서 가져와 설치해야 하는 곳은 아니지 않을까?
참고문헌
1.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2. 김훈, 2017, 남한산성, 학고재
3. 심광주, 2011, 남한산성의 축성기술, 남한산성, 경기도박물관 p.181~184
4. 심광주, 2012, 주장성(晝長城) 축성기술과 남한산성, 한국성곽학보 21호 p.128-153.
5. 이덕일, 김병기, 2012,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 예스위캔
6. 조영훈, 이찬희, 2015, 한양도성 석재공급지 추정을 위한 고문헌 분석 및 암석학적 데이터베이스 구축, 암석학회지, 제24권 제3호 P. 193~207
7. 지역N문화포털, www.nculture.org
8. 박상구, 박성철, 김재환, 좌용주, 2017, 남한산성 외성 성벽부재에 대한 암석학적 연구 및 산지 추정, 암석학회지, 제26권 제4호 p. 253-360
9. 지질도, 뚝섬 도폭, 둔전 도폭,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