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화강암 둘러보기
산을 간다고 하면 흔히 정상 정복을 생각한다.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면 정상 정복기가 넘쳐난다. 그래서 망설인다. 나는 누구들처럼 장비도 없고 든든한 체력도 없다. 땀 흘리며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를 내어놓기도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평지길로 다닐 수 있는 한적한 곳은 없을까 하고 불암산과 수락산을 한꺼번에 다녀올 계획을 실행해 본다.
북한산(835.3m)을 가장 잘 보는 것은 북한산에 가는 것이 아니다. 좀 거리를 띄워 놓고 멀찍이 보아야 그 가치를 아는 법이다. 게다가 게으른 답사자는 등반가가 아니라고 스스로 이야기한다. 상계역 4번 출구에서 10분쯤 걸어오면 영신여자 고등학교 못 미쳐 ‘불암산 엘리베이터전망대’가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몇 초 뒤 북한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봉산 뷰는 덤이다. 북한산과 불암산 중간으로 추가령 구조곡을 지나가는 3번 국도가 남북으로 이어진다. 불암산(509.6m)에서 북한산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가 지는 저녁은 북한산에 그늘이 드리운다. 적어도 아침에 오른다면 멋진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볼 수 있겠다.
누구든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을 보면 같은 암석이구나 그리고 같은 모양으로 생겼구나 하고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암봉은 모두 화강암 덩어리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마치 양파 껍질처럼 암석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층상(판상) 절리라고 하는데 겉의 암석층이 떨어져 나오면 안쪽 층이 나타나게 된다.
마그마가 깊은 땅속(10km 내외)에서 굳은 심성암인 화강암이 여러 이유로 상승하게 된다. 그 후 지표가 풍화 침식되면 점점 상부를 누르던 압력이 줄어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암석은 지표면에 수평하게 암체에서 떨어지는데 이를 층상절리라고 한다. 표토가 없는 산봉우리에서 잘 볼 수 있는데 계곡에서도 너럭바위의 형태로 쉽게 볼 수 있다.
등반가 암벽등반을 하는 암벽이 절리면이고 아직 떨어져 나오지 않은 절리면이 어느 순간 낙하하기도 한다. 또 암석면이 편평하여 수직인 판상절리에는 마애불 등을 새기기 좋고 돌을 뜨기 좋아 채석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중계동 불암고등학교에서 약 900m 정도 불암산을 오르면 학도암(鶴到庵)이 있다. 학이 찾아드는 곳이란 뜻의 고즈넉한 암자다. 오르는 길이 짧지만 매우 가파른데 절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제법이다. 멀리 서울 시내와 관악산이 보인다. 1624년(인조 2년)에 무공스님이 같은 산의 암자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 창건했다고 한다. 주차장 입구 벽에 2기에 마애 부도가 있어 특이하다.
대웅전 뒤 화강암 암벽에 높이 12.4m, 너비 7m의 대형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새겨져 있다(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전체적으로 비례가 자연스러운데 당당한 체구의 머리에는 중앙에 작은 아미타불이 새겨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눈은 가늘고 길고 코는 우뚝하고 펑퍼짐하며 입술은 얇게 웃는 듯한 모양이다. 귀는 뚜렷하지 않다. 삼도가 수학공식처럼 새겨져 있다. 법의는 통견의이고 가슴에 내의가 매듭지어 있다. 수인은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하품중생인이고 왼 손목에 팔찌가 있다. 가슴 중앙에 복장 감실의 흔적이 있다(복장 감실은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도 있다). 앙련(仰蓮: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과 복련(覆蓮: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겹친 연꽃무늬 대좌가 있고 머리에서 나오는 두광과 몸에서 나오는 신광이 표현되어 있다.
학도암에 대한 기록이 당시 본사였던 남양주 봉선사의 <봉선본말사>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마애불은 명성황후의 시주로 1872년(고종 9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바위 좌측면에 명문이 있는데 연구결과에 따르면 금어(金魚, 불화를 그리는 스님) 장엽과 석수 5명의 이름과 마애불 조성에 참여한 스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 명성황후는 1871년에 첫아기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었다. 그러한 연유로 아미타 마애불은 죽은 아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다고 보고 있다. 조성시기와 조성자,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드문 마애불이다.
불암산과 수락산은 노출된 지 오래된 화강암 지역이기 때문에 미세 지형이 많이 나타나 있다. 이름도 이상한 바위부터 점잖지 못한 이름의 바위까지 다른 지역처럼 산재해 있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여행자에겐 도서관 같은 곳이다. 아래 사진도 수락산 등산로에 나타난 절리와 타포니 구조다. 물끄러미 쳐다보면 시간의 흐름과 우연이 만들어 놓은 결과에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물론 이런 지질환경은 식생의 다양성을 조절하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할 이야기다.
수락산 7부 능선에는 채석장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채석장은 1960~70년대 서울의 개발 수요에 맞춰 화강암을 채취하던 채석장이 있다. 서울에는 한양도성 외부에 동쪽으로는 창신동, 개운산, 용두산 등에 최근까지 채석한 흔적이 남아있다.
한양도성의 보수를 위해 세종시대부터 노원 지역의 채석장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성 도성 축성 시에는 도성 인근의 암석을 이용했다. 조영훈 등(2015)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금위영등록, 금위영도성개축등록을 종합해 보면 석재 공급지에 대한 사항은 세종부터 철종 때까지 약 160여 건이 언급된다고 한다. 세종 2년(1402)에 안암동에서 채석되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세종 30년(1448)부터 성종 15년(1463)까지 도성 내외의 채석 금지에 대한 상소가 있었다. 연산 11년(1505)에는 남산을 포함하여 사현 일대, 남소문동, 인왕산 등지에서 채석을 허가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8년(1682)에 처음으로 노원의 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숙종 30년(1704)에는 운반 도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정조 11년(1787)부터 철종 때까지 노원에서만 공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화강암은 중생대 쥐라기인 약 1억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저반형 화강암을 일컬으며 포천에서부터 남산까지 땅콩처럼 나타난다. 중립 내지 조립질의 흑운모 화강암으로 석영, 정장석, 사장석, 흑운모로 구성되어 있다. 판구조론적으로 대륙호 섭입대에서 하부 지각 물질이 용융되어 생성된 마그마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해양판이 육지판 밑으로 섭입 될 때 육지 쪽에서 판들의 마찰열 등으로 마그마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지표 쪽으로 올라오다가 10여 km 하부에서 암석으로 굳은 것이다. 서울화강암은 선캄브리아 시대의 편마암류를 관입하였기 때문에 검은색의 고철질 포유암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각종 진경산수에 나타난 그 화강암이다.
북한산, 도봉산이 유명한 이유는 도심에서도 가깝기도 하지만 암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하얗게 빛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마치 만년설 같이 보인다. 암봉은 판상절리를 이루어 봉긋하고 예쁘게 솟아올라 있다. 하늘로 상승하는 화살촉 같은 방향성도 보인다. 마치 마그마가 상승할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정상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고 정상 아래 것들이 보이고, 산아래에는 산의 전체 모습이 보인다. 마치 우리가 삶을 되돌아볼 때 멀리 떨어져서 혹은 멀리 떠나가서 보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문헌
1. 유동후, 마애불을 찾아가는 여행, 2014, 토파즈
2. 조영훈, 이찬희, 2015, 한양도성 석재공급지 추정을 위한 고문헌 분석 및 암석학적 데이터베이스 구축, 암석학회지, 제24권 제3호 P. 193~207
3. 최복일, 한국의 마애불, 2019, 달아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