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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14. 2022

옥천암 보도각백불 vs.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서울화강암의 마애불 답사하기

림이나 음악을 듣고 문화유산을 볼 때, 또는 맛있는 음식점을 다니면서 서로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속성인 듯하다. 그러면서 차이와 공통점을 발견하고 머릿속에 인식하는 것이리라. 점은 위치만을 나타내지만 두 점을 잇는 선분은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말이다.

마애불을 보면서 항상 비교하게 되는 것은 ‘보도각백불’과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다. 비록 이름 붙여진 형식은 다르지만 만들어진 시대, 재질, 크기, 조각 방식, 백불이라는 점, 보살상의 모양이 매우 유사한 마애불이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짧은 기간에 두 유산을 비교해서 볼 수 있었다. 보는 시간 간격이 벌어지면 디테일도 사라지고 비교가 어렵다. 그래서 몰아서 봐야 하나 보다.

옥천암 보도각백불


보도각백불 전경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 경내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진 관세음보살 좌상으로 예전 보물 번호로 제1820호이다. 높이는 5m이다.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의 보도각(普渡閣)이 있고 그 안에 불상이 호분(조개껍질 가루)으로 희게 칠해져 있어 ‘보도각백불’이라고 불린다. 보도각이라는 현판은 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이분 글씨와 그림은 여기저기 참 많기도 하다.)


보도각백불의 얼굴 부분


머리에는 금분으로 그려진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평면적으로 묘사된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있다. 둥글고 통통한 큰 얼굴에 가는 눈과 작은 입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검게 색칠된 머리카락은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감싸 깊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살며시 놓여 있는 설법인(전법륜인) 수인을 하고 있다.

보관은 높은 편인데 좌우로 관대가 돌출되고 보관 장식이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보물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에서도 확인된다. 머리 양쪽에는 보호각을 고정했던 것으로 보이는 홈이 메워져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현재의 위치 뒤편의 바위산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인 북한산 일대에 흔한 토어(tor)의 일종으로 보인다. 화강암 등 심성암은 절리에 의해 본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이에 따라 꼭대기에 있던 암석이 풍화되어 분리되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특히 보살상이 새겨진 면을 살펴보면 곡면을 이루며 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화강암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판상절리의 흔적으로 보인다.

보살상의 좌측면을 보면 2개 조의 석영맥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다행히 보살상이 새겨진 앞면에는 석영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단 보살상의 오른쪽 무릎 부분에 포획암이 눈에 띈다. 이는 마그마가 관입할 때 주변에 있던 암석이 뜯어져 포함된 흔적이다. 결국 모암인 검은색 염기성암을 관입한 화강암질 마그마가 응결되었고 고결된 후 석영맥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획암은 주변 암석과 분리되기 쉬운데 이에 따라 타포니(tafoni)라는 풍화혈이 생긴다. 보살상의 왼쪽 측면을 보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풍화혈은 인왕산 선바위에도 잘 나타난다.



보도각백불 오른쪽 무릎 근처의 포획암
보도각백불 우측면의 석영맥과 풍화형, 멀리 북악산이 보인다.


마애보살상이 조성됐을 때부터 백불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고종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이곳에서 복을 빌었는데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한다. 호분이 계속 덧입혀져 사진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암자 건너편에 작은 무료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마애좌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다. ‘불암(佛巖)’ 또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부터 ‘백의관음상’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불상 앞에서 기원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대한 불암 바위 앞면에 5m의 장대한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전실) 형 건물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며 눈, 코, 잎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다. 12~13세기의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보도각백불 주변의 화강암


보도각백불의 주변에는 북한산을 이루는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 화강암이 넓게 나타나고 있다. 대보 화강암은 깊은 심도에 냉각되어 입자가 굵은 조립질이다. 풍화되어 장석이 사라지면 마사토로 남는다. 동두천부터 남산까지 분포한다.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도 같은 암석이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전경

성북구 안암동에는 보물 1828호로 지정된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개운사의 말사인 보타사의 한창 공사 중인 대웅전 뒤쪽 마당에 있다. 머리 위에는 너럭바위가 지붕처럼 덮고 있다. 화강암 벽에 돋을새김으로 보살상을 조각했다. 

머리에 뿔이 있는 보관을 썼고 뿔 끝에는 복잡한 타원형 장식이 늘어져 있다. 보도각백불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볼륨 있는 얼굴이 고려시대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얼굴 길이만 한 귀와 발끝에는 노리개가 달려 있다.
법의는 통견의고 양 어깨를 감싸고 한쪽 끝이 왼쪽 가슴에서 흘러나와 무릎까지 부드럽게 늘어져 있다. 발의 모양은 도식화되어 있고 널찍하게 양발을 포갠 결가부좌 자세이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져 엄지와 검지를 맞댔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댔다. 마애불의 외곽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의 얼굴 부분


지금은 호분칠이 많이 벗겨졌지만, 몸체와 얼굴에 흰 칠을 해서 백불(白佛)의 인상을 풍기는데, 입술은 붉은색, 눈과 눈썹 윤곽에는 검은색이 칠해져 있다. 불상의 좌우 어깨 양쪽에 홈이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보호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좌상 왼편 바닥에도 홈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특별한 홈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 아래에는 조성 당시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보타사 대웅전 뒤쪽 바위의 면을 따라 조각된 상이다. 넓은 어깨에 당당한 신체를 지녔으며, 머리에 쓴 원통 모양의 관 좌우로 장식이 늘어져 있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눈이 길며, 입은 자그마하다. 몸에는 보살의 옷인 천의(天衣)를 걸쳤으며, 어깨 위로는 보살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다. 양손은 몸에 비해 큰데,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댔다.
마애보살상의 무릎 왼쪽에는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모양의 조각과 신중(불교의 수호신)과 관련된 (글이)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이 마애보살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좌우에 있는 직사각형의 홈은 과거 목조 구조물이 있었던 흔적이다. 마애보살상에 관한 문헌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지만, 5m에 달하는 크기, 넓은 어깨의 당당한 신체와 작은 입, 좌우에 장식이 달려있는 관 등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마애조각상의 특징으로, 마애보살좌상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이 조각된 면을 보면 보도각백불처럼 부드럽게 곡선을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이 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곡선상의 판상절리인지는 불분명하다. 많은 마애불이 볼록한 곡선상의 절리 면에 새겨지는데 두 마애불의 오목한 곡선 면은 일반적인 노두와는 다른 방향이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의 바위 확대 사진


마애불을 이루는 암석은 보도각백불과 마찬가지로 쥐라기 화강암으로 붉은 칼륨장석이 포함되어 붉은빛을 띤다. 자세히 보면 암편이 양파껍질처럼 떨어져 나오는 박리현상(exfoliation)을 볼 수 있다. 이는 암석에 포함된 장석 등이 풍화작용을 받으면서 점토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부피가 증가하며 암편이 떨어져 나오는 현상이다. 북한산, 도봉산 등 화강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왼쪽 무릎 부분의 타공 흔적


마애불의 왼편 무릎 부분에는 채석을 위한 구멍이 보인다. 마애불 앞에 예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타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칫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았을까 우려가 들게 한다. 현재도 마애불 뒤편에는 찻길이 있어 진동이 그대로 전달된다.

보타사는 중앙승가대학교(1979년 설립)가 개운사로 이사 오던 1981년에 기숙사로 쓰였다고 하고 그 이전에는 불교전문강원의 비구니 숙소였다고 한다. 그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이 되었다가 보타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타는 ‘보타락가(補陀洛迦)’의 준말로 관세음보살의 주거처를 말한다.

보타사는 1992년에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의 숨겨진 문화유산으로 마애보살좌상을 발견해 내면서 주목받았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왼편 신중패(神衆牌)를 참고해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2014년에 보물 제1828호로 지정됐다. 그래서 80년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보타사 경내에 작은 주차 공간이 있다.

개운사와 애기능

보타사를 품은 본사인 개운사는 조선 태조 때 이핵관이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지금의 고려대 자연계 캠퍼스 자리에서 영도사(永導寺)로 시작했다.

정조 2년(1778년), 호조 참판 홍낙춘의 딸이며 홍국영의 누이인 홍 씨가 빈으로 간택된다. 빈이 간택을 통해 정해진 특이한 케이스였다. 말도 많았던 간택 과정을 겪었으나 이듬해 14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이때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를 인명(仁明)이라고 지었고 묘소를 안암동에 마련하였다. 이렇게 느닷없이 원빈 홍빈(1766-1779) 묘인 인명원(仁明園)이 절 옆에 들어서는 바람에 영도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절 이름도 개운사로 고쳤다. 인명원은 지금의 고려대 자연계 캠퍼스의 과학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애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홍국영이 죽은 후 인명원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원빈 묘(墓)로 강등되었다. 이방원에게 죽은 의안대군 방석의 묘, 소현세자의 민회빈강씨의 묘도 애기능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규모가 작은 능을 애기능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자연계 캠퍼스를 애기능 캠퍼스라고도 불린다. 1950년 서삼능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전했다.


애기능생활관 앞에 있는 인명원 표석
고려대학교 자연계캠퍼스 애기능 전경(나무가 많은 부분)


참고문헌

1.     문대명, 마애불, 1991, 대원사
2.     유동후, 마애불을 찾아가는 여행, 2014,  토파즈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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