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 현무암에 얽힌 슬픈 이야기
철원평야를 제대로 보려면 연천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북행하여 대마 사거리에서 우측 편에 있는 소이산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북쪽으로 보이는 옛 철원을 중심으로 김일성 고지라는 고암산(780m)이 좌측에 보이고 그 남쪽에는 백마고지 기념탑이 서있다. 가을이면 잘 익은 벼의 황금물결이 아름다운 이곳은 하지만 예전에는 벼농사를 짓지 못하던 곳이었다. 관개용수가 부족하여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비로소 관개시설이 갖춰져 논농사가 시작되었다. 물이 부족한 이유는 기반암이 현무암이기 때문이다. 현무암 풍화토는 비옥하지만 강수가 암반층에 저장되지 못하고 현무암을 타고 내려가 흘러가 버린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상류지역 물을 빼돌려 한때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용화, 하갈, 토교 저수지 등을 개발하면서 지금은 강원도에서 쌀이 가장 많이(22%) 생산되는 곳이다.
3번 국도는 원래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변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현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 사거리(좌측 노란 별)까지만 갈 수 있다. 그 북쪽은 민통선 지역이다. 대마 사거리에서 북동 방향으로 10km 정도 가면 궁예(869~918, 제위 901~918)의 태봉국 철원 성터다. 옛 월정역이 외성 안쪽에 있었다. 지금은 비무장지대 한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반을 가른다. 정말 기막힌 위치다. 남측, 북측에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궁예 최후의 왕성
궁예는 구 철원 근처에 도읍을 정한 후 898년 송악으로 일단 천도한다. 901년 후 고려왕으로 자칭한 후 4년 만인 905년 다시 철원 풍천읍(원)으로 천도한다. 이후 6년 뒤인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다. 천도의 이유는 아직 불명확한데 송악의 호족들을 피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호족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904년 7월 지지하던 청주에서 민호 일천호를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고암산(780m, 일명 김일성 고지)을 진산으로 하여 궁예가 904년 도읍으로 정했다. 정확한 축성 방식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외곽성은 현무암 석축으로 내곽 성은 토성으로 쌓았다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905년 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새 서울(철원)에서 극히 사치스러운 대궐과 누대를 지어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을 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 (전체 면적은 950만 평방m, 현재 서울 중구 정도 크기)에 이른다. 한양도성의 17~18㎞에 비교해 보아도 꽤 큰 규모임을 알 수 있다. 경복궁 재건에서도 보았듯이 궁성의 건축은 잘하면 왕조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이 되지만 잘못하면 욕만 먹고 나라가 망하는 계기가 된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으로 좌측의 석탑은 당시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석등으로는 규모가 크고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뛰어나다. 정성원(2011)에 따르면 궁예를 지원했던 명주지역의 대호족인 김순식의 아버지 허월이 책임자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선림원지 석등과 굴산사지 부도를 만든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리라 주장한다. 이런 높이에 불을 켜면 아래 부분이 어둡기 때문에 주변 공간이 아주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높이가 약 4m 정도로 내성인 중전 앞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철원성은 대단히 규모가 크고 체계가 잡힌 도성이었다고 생각된다.
태봉국 철원성이 있는 풍천원 벌판은 한국전쟁 때 평강-철원-김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에 속한 격전지였다. 2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백마고지와 김일성 고지(고암산), 피의 500 능선, 낙타고지가 주위에 버티고 있고, 북한 쪽으로는 평강고원(해발 330m)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높은 산은 깊은 골짜기가 있게 마련인데 풍천원 벌판은 평평하기만 하다. 이런 이유는 신생대인 120~12만 년 전 북한 평강의 오리산에서 흘러내려온 전곡 현무암 때문이다.
관심법으로도 몰랐던 철원의 현무암
비교적 낮은 산인 오리산에서 흘러나온 전곡 현무암은 남과 북으로 낮은 지형을 메우며 흘러내렸다. 남쪽으로는 임진강까지 무려 100여 km를 흘러내려왔다.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분출한 현무암은 하와이에서 보듯이 중력에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렀다. 예전 하천을 따라 흘렀을 것이다. 그 증거는 백의리층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현무암층의 가장 아래에는 옛 강가의 자갈, 조약돌 등으로 구성된 하천 퇴적물로 구성된 층이 관찰되는데 이층을 백의리층이라고 한다. 자갈의 장방형 축 방향을 보면 물이 사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처음 흘러나온 현무암은 구하천의 경로를 따라 마치 홍수가 난 것처럼 내려왔을 것이다.
이러한 현무암은 상층부가 평평한 대지를 만들었다. 상류에서는 11회, 하류에서는 3~4회 현무암이 흐른 증거가 관찰된다. 이렇게 가파른 골짜기를 메우면서 넓은 평야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지형에는 하천의 발생이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데 이를 유년기 지형이라고 한다. 새 하도(강길)는 주로 기존 기반암과 현무암의 경계를 따라 만들어진다. 이때 현무암은 주상절리를 따라 잘라지기 때문에 절벽을 형성한 하도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농사에 강물을 사용하려면 40~50m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 또한 현무암 대지가 상류의 높이를 높였기 때문에 기존 하천보다 상하류 간의 높이차가 커져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요즘은 이 특징을 이용하여 래프팅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한 나라의 수도의 기능에 필수적인 강을 통한 운반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철원 풍천원은 지질학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젊은 땅이다. 새로운 정권을 가장 젊은 땅에 세우고자 한 셈이다. 하지만 농사짓기도 어렵고 물길의 이용도 어려운 척박한 땅에 태봉성은 세워진 것이다. 현무암에 의해 만들어진 평야에 혹한 궁예는 현무암 지질 때문에 어려운 정세가 만들어지고 망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궁예는 현무암을 보고 돌이 벌레에 먹혔으니 내 운명도 다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궁예는 자신에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관심법이다. 관심법은 사람에게만 통했지 암석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참고문헌
1. 김부식, 삼국사기, 열전 제10: 궁예, 견훤
2. 디지털철원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심재연, 2019, 일제 강점기 태봉국 철원성 조사와 봉선사지, 한국문화유물연구, 제50권 제1호, p. 258~271
4. 이민부, 이광률, 김남신, 2004, 추가령 열곡의 철원-평강 용암대지 형성에 따른 하계망 혼란과 재편성, 대한지리학회지 제39권 제6호, p. 833~844
5. 정성권, 2011, 태봉국도성(궁예도성)내 풍천원 석등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제7호, p.167~211
6. 조흥섭, 2011, 한반도 자연사 기행, 한겨레출판
7. 최영선, 1995, 자연사 기행, 한겨레신문사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작가,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