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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수 Mar 26. 2020

고통의 이유  

⌜생로병사의 비밀⌟ 작가의 낯선 투병기

긴 침묵을 만날 때가 있다. 언제든 어떤 식이든, 불현 듯 혹은 슬그머니. 침묵은 찾아온다. 실연의 아픔이든 실직의 암담함이 든 질병의 고통이든. 무겁고 잠잠한 순간은 원래 삶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2012년 봄. 재일교포 남편과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난치병 진단을 받았다. 아직 한창 신혼이었던 때. 다행이라면 아직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을까. 실감도 나지 않았고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잘 몰라서 잘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실체를 알았다면 막막함에 주저앉았을지도.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누웠다. 일본말에 네타키리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말로 하면 누운 뱅이 정도의 느낌이다. 증상이 심했다. 통증도 깊었다. 근육과 관절이 굳어 남편이 샤워를 시키고 밥을 먹였다. 그렇지만 가끔, 몸에도 볕이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엔 현관 밖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쪼였다. 일본의 해는 유독 따갑고, 눈이 부셨다. 낯설고 외로운 땅에서, 부신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인생은 참 느닷없구나.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계획할 수 없는, 미래가 사라진 사람이 되다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열정 넘치는 방송작가에서 아파 누운 외국인 여자가 되었다. 


그래도 비관은 안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직업이 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하루 통증을 견디는 것을 일로 삼았다. 눈이라도 떠지면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다. 세어보니 어느 겨울엔 4백여 편의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4년 반이 지나갔다. 열 세 번의 봄여름과 열 두 번의 가을겨울이었다. 그리고 운 좋은 어느 여름날. 약물치료가 끝났다. 얼떨떨했다. 이내 곧, 마음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위시리스트를 세우며 달라질 날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희망에 그쳤다. 회복은 더뎠다. 누워있던 사람이 단박에 뛸 수는 없었다. 다시,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맥 빠진 나날이었다. 그렇게 1년, 또 2년, 속절없이 계절만 바뀌었다. 이상하게도, 힘든 날은 치료가 끝난 쪽에 있었다. 


경험하지 못한 큰일을 맞닥뜨릴 때, 그 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부정과 분노와 타협과 우울, 그리고 마침내 수용의 단계에 이르는 동안, 가장 힘든 시간은 당연히 분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서가 조금 달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사년 반의 시간은 오히려 타협의 시기였다. 부정과 분노는 없었다. 담담히 받아들여 투병에 치중했던 그 때는 외려 건설적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터널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분노가 일었다. 우울이 찾아왔다.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연한 감정도 아니었다. 왜 이제야 이런 감정이 드는가. 혼란스러웠다. 


마침내는 그 시간도 투병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사실, 달리 대책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맛 집에 가서 비싼 밥을 먹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팔자 좋은 아줌마의 하루 같겠지만, 나름의 피나는 재활이자 운동이었다. 그렇게 몸도 제법 좋아지고 어느 덧 일본 생활에 적응이 꽤 되었을 때, 갑자기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긴 길을 돌아 적응을 할 만하니 도로 제자리. 피식. 인생의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고통의 목적은 선명하지 않다. 그 의미는 보통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 누구는 고통을 어긋남의 도구로 쓰고  또 누구는 상처만으로 간직한다. 어떤 이는 훈련의 교재로 사용하고 또 어떤 이는 깨달음의 근거로 삼는다. 고통이 왜 오는지, 내게 오는 고통은 왜 달라 보이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너무 뻔한 말일지라도,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것뿐이다. 어차피 고통이 존재한다면 나만의 몫이, 내가 사는 동안 존재한다면 어찌됐든 살아야하므로 살아내야 하므로, 이것뿐인 이유로도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의 이유를 지금은 모를지라도 언젠가 깨닫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삶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고통은 나름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마침내 고통의 이유가 되어 삶의 모호함을 끝내고 분명한 목표와 확신을 갖는데 뜨거운 동력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오늘 하루도,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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