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평화를 걱정하는 히말라야 사두
바바지의 지시대로, 긴 돌이 있는 장소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다. 마치고 나오니, 바바지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물어보았다.
‘아니, 남의 기도는 알아서 뭣 하려고?’
그래도, 순순히 무엇을 기도했는지를 토로하였다. 그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마음을 열게 끔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는 것 같이 느꼈다. 무엇이든 토로하게 끔 하는 신비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당당히 기도한 것을 토로하였다.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 했소이다.”
그러자, 그는,
“엥?”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였다.
“아니, 자네가 세계 평화 기도를 하면, 나는 어떻게 먹고살라고?!”
그의 말인 즉, 세계 평화가 오게 되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들게 될 테고, 본인은 고객을 잃게 되므로, 살기 더 팍팍해질 것이라는 뉘앙스였다. 사람이 찾아와야 본인에게 먹을 것도 갔다 바치고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솔직한 사두’를 보았나? 그러고 보니 세상은 상대적으로 돌아간다. 양자 얽힘은 양자 역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멀리 떨어진 두 입자의 연결성이 실험을 통해 드러났다. 멀리 떨어진 전자가 스핀업 하는 바로 그 순간 양전자는 스핀다운 한다는 것. 이 실험이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방향으로만 스핀들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핀이 업 되면 다른 측면은 스핀이 다운된다. 모두 스핀이 업의 상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다운도 마찬가지. 이는 이 세상의 상대적인 관점을 대변해 준다. 특정한 지역이 대낮이라면 특정한 지역이 한 밤중인 곳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빛의 강도에 따라 스펙트럼처럼 낮과 밤의 경계에 선 지역들이 드리운다. 빛만으로는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없고 어둠만으로도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의 조화가 필요하다. 빛으로는 에너지를 받고 어둠을 통해서는 휴식을 취한다. 빛이 너무 강하다면 에너지를 받기도 전에 태워질 것이고 어둠이 너무 강하다면 마음이 타 들어갈 것이다. 빛과 어둠에 영향을 받는다면 말이다.
평화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 조금은 쓰디쓴 현실이지만 이 세상은 평화와 혼란 (혹, 갈등)이 공존한다. 무엇보다, 무지하기 때문에 평화를 읊은 것이었다. 사실 아직 평화를 언급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진지함과는 대조적인 사두의 가벼워 보이는 대답이 오히려 교훈으로 다가왔다. 척박해 보이는 히말라야에서 거주하는 수행자들이 매우 진지할 것으로 오해를 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콜카타 한 거리 벽에 쓰였던 글이 떠오른다. 이 세상은 무대, 삶은 드라마, 사람은 연기자, 신은 디렉터라며 환영했던 그 글.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저서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서 말한다. 역할에 동일화되지 말라고. 역할에 동일화하기 때문에 심각해지고 진중해지는 것이지 않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역할과 동일화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 각자가 이곳에서 배워야 할 삶의 예술이고 가장 중요한 배움이다.”에크하르트 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