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라자의 춤
미국 한 힌두 사원에서 춤을 추는 것이 인상 깊었다. 춤에는 좀 어색했던 지라 머뭇거리며 보고만 있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손을 잡고 빙빙 함께 돌았다.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주와의 교감하는 것이야.”
히말라야 바바지 사두의 말마따나 또다시 인도 케랄라에 오게 되었다. 전에 국제 요가 지도자 과정 수행 했던 곳이었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면 자주 상호작용하는 친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방문에도 그런 친구가 생겼다. 아니 선배라고 해야 할 지도. 그는, 수행 생활이 비교적 오래된 베테랑처럼 보였다. 사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특히 성적 금욕을 실천) 브라흐마차리야였다. 어느 날, 그가 구석진 곳에서 혼자 아름답게 춤을 추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에너지를 받으시게.”
아쉬람에 머물면서 자발적으로 춤을 추는 인도 친구들을 자주 보았다. 흥겨운 노래에 따라서 여러 친구들이 무대 위에서 흥겹게 춤을 추었다. 발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그 장면 거의 그대로였다. 그 역시도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을 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춤은 나타라자를 연상케 하였다. 한쪽 발은 옆으로 들어 올리고 또 다른 한쪽 발은 악마를 밟고 있으며 네 개의 손을 휘황찬란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포즈를 잡으며 춤을 춘다는 영락없는 나타라자의 모습이었다. 나타라자의 춤은 시바가 세상을 창조하고 파괴할 때 추는 춤의 형상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춤을 추는 동안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주변에 머물면 그 에너지를 받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는, 아마도 무당이나 샤먼이 춤을 추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지 않나 싶다. 무당이 날렵한 칼 위를 걸어 가 듯, 요기들은 불 밭을 걸어가기도 한다.
당시에 행위 요가라 불리는 카르마 요가를 하면서 체력이 종종 쉽게 바닥이 나곤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개별 요가 수행뿐만이 아니라, 하루 두 차례의 요가 아사나 수업 외에도 주어진 카르마 요가의 일환으로 청소 맡게 되었다. 그럼에도 소식을 최대한 유지하려 했으므로 에너지가 부족했을 것이다.
사실은 그가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 친구가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쉬람 근처에서 거주하라고 제안을 해 주기도 하였다. 아주 귀한 조언이었다. 수행하는 사람은 주기적으로 방전된 에너지를 채워 줘야 한다. 탁한 에너지로 몸과 마음 특히 좀 더 깊은 영역이 지칠 때, 다시 채워줄 다양한 경로가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아쉬람 근처에 거주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장소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도 중요하다. 종종 수행력이 높은 사람조차도 대중들 사이에 머물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당시 그가 한 살 어리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의 조언을 받기가 망설여졌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해 주었던 심부름 역시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에고에 의한 미성숙한 판단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는 사실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던 것이다. 허물을 벗어 낼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누군가 한 수행자를 찾아왔다. 그리곤 이렇게 여쭈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그 수행자는 대답을 하였다.
“왜 원수로 지내려고 하는가? 같이 수행하는 도반으로 지내면 되지.”
종교를 망라하고 수행이란 자기 자신 즉 에고를 내려놓는 일이지 않나 싶다. 스승이란 구루란 어쩌면 최전방에서 제자의 에고를 내려놓도록 설계하는 지휘자일 것이다. 그렇게 설계된 설정에선 다양한 경로로 질긴 에고를 시험하는 상황이 발생이 되곤 한다. 모욕감이 발생하도록 할 것이고 힘든 일을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 억울한 일들이 발생하게끔 할지도 모른다.
요가에서는 종종 고려한다.
“가장 높은 경지의 요가는 부상과 모욕감을 참는 것”이라고.
위빠사나 명상 스승으로 유명한 고엔카는 그의 구루로 고려될 수 있는 미얀마의 우바 킨의 지도 아래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시험을 받아야 했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의 저자 류시화 작가 역시 인도에서 한 구루를 찾아가 그의 집을 지었지만 구루가 그 집들을 속속히 파괴했던 것도 그와 비슷한 일환일 것이다.
초보 수행자의 경우 쉽게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기도 한다. 가장 속의 축복이었음을. 그릇의 크기만큼 받게 된다.
물론, 정말 높은 경지의 요기는 부상과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