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내 관심사와 열정과 관련된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 무작정 유학을 중단하고 떠났지만 그리고 최근 10일간의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나는 삶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아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 마음 상태로, 뭄바이에 도착하였다. 인도 최대의 도시. 인도에서도 가장 물질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뉴델리는 정치 중심이라면 뭄바이는 경제 중심이다. 마침 뭄바이에는 인도의 서쪽에서도 중간쯤에 위치한 해안선 근처에 자리잡아 자연스럽게 무역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뭄바이 한 역에 내린 후, 이미 정해놓은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하는 일중 하나라면 숙소 체크인이다. 일단은 머물 장소가 정해져야 다음 활동에 제약이 적다. 그 게스트하우스로 도착하고 체크인을 하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온라인으로 영어관련 조언해주는 일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머리에 헤드폰 같은 것을 끼고 화상채팅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종종 비추어졌다. 그러던 중 그가 한가로이 보일 때, 공용장소에서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이것저것 유용한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뭄바이에서 어디에 들리면 괜찮을지 그리고 또한 나의 관심사를 파악한 후에 다음행선지에 가볼만한 장소도 추천해 주었다. 일단은 뭄바이 근처에는 글로벌 위빠사나 파고다가 위치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벵갈루루 (인도 실리콘 밸리로 알려진 곳)에 위치한 아트 오브 리빙 (art of living)이라는 영정 수련 혹은 명상 단체를 소개해 주기도 하였다. 인도 전지역에 아트 오브 리빙이 있지만 유독 그 지역을 추천해 주었다.
그렇게 유용한 정보를 획득하고,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갑자기 크리슈나 (Krishna)와 카르마 (Karma)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힌두교에서는 주요 삼신은 브라흐마, 비슈누, 그리고 시바다. 이들을 산스크리트어로 트리무르티 (Trimūrti)라 한다. 여기에서 ‘tri’는 숫자 삼 (3)을 나타낸다. 영어의 ‘three’ (3)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삼주신은 각 창조 (브라흐마), 유지 (비슈누), 시바 (파괴)를 담당한다. 이 삼주신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신이라면 비슈누다. 힌두교에서, 크리슈나 (Krishna)는 비슈누의 8번째 화신으로 여겨진다.
그가 제안 하길,
“카르마에 대해 너무 많이 신경 쓰지 말고 의무를 고려하시게”
카르마 (karma)란 산스크리트어 그대로 해석하면 행위 (action)다. 사람은 크게 세 가지의 행위로 업을 짓는다고 한다. 그것은 행동 (혹, 몸), 말, 그리고 마음이다. 행동과 말은 외부로 드러나는 아웃풋 (output)과 같지만 마음은 아웃풋이 되기 전 단계다. 마음은 더 미묘한 수준이며 더 본질적인 작용이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힌두교도와 불교도인들은 행동, 말, 그리고 마음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 혹은 형성이 된다고 믿는다. 과거의 행동, 말, 그리고 마음이 현재를 구성하고 현재의 행동, 말, 그리고 마음이 미래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또 그가 말하길,
“좋고 나쁨은 우리 자신의 해석에 달려 있네”
우리가 말하는 좋음과 나쁨 그리고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 모두 업의 범주에 속한다. 즉, 좋은 일을 해도 좋은 결과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좋고 나쁨이란 사람의 관점에서 정해 놓은 경계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관점에서, 좋고 나쁨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여기서 한가지 철학적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세상의 관점에서, 세상이 정해 놓은 그러한 규칙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일까?’
힌두교의 중요 고대서사시로 알려진 <<마하바라타>>의 주요 등장인물인 아르주나 (Arjuna)는 고민이 있었다. 그의 친인척들과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들, 혈연으로 이어진 가까운 친인척들을 살육하고 싶겠는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던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는 본인의 의무를 다 할 것을 제안한다.
아르주나 개인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일어나려고 하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비단 운명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르주나는 자신의 운명에 맞서게 된다.
힌두교에서 크리슈나는 유지 혹은 발란스를 담당하는 비슈누의 8번째 화신 그리고 붓다를 9번째 화신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크리슈나와 붓다의 이미지는 매우 다른 경향이 있다. 자유분방하게 피리를 불며 소들과 어울리는 크리슈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붓다의 모습은 대부분 가부좌를 튼 명상자세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조언한 것처럼, 크리슈나는 좀 더 이 세상의 관점에서의 역할을 강조했다면, 붓다는 많은 사람들이 해탈에 이르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붓다가 떠나기전 500여명의 아라한 (즉, 불교식 성자 표현)이 그의 가르침을 기록하였다. 붓다는 인류의 기록된 문헌 중 아마도 아니 십중팔구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이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크리슈나가 강조한 것이 이 세상의 의무라면 붓다가 강조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일 것이다. 즉, 해탈이란 해석에 따라 완전한 고통에서 벗어난 자유를 일컫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현대에서는 아르주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나의 의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친구가 대화의 말미에 이렇게 넌지시 말했다.
“자네의 심장은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알것이라네.”
평범한 게스트하우스 직원치고는 심오한 말을 시기적절하게 건네주는 친구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의 의무를 되돌아 볼 기회가 많이 없었던것 같다. 나는 깡촌 시골 농부의 아들로 시골에서 대부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순진한 촌놈이었다. 어찌보면 매우 치밀한 계산과 이해관계 속에서 정밀하게 짜여진 사회구조와 계층에 나와 같은 풋내기 촌놈이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란 아마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되돌아보니, 대부분은 파도에 휩쓸려 왔다. 남들이 한다고 나도 대학교에 들어갔고, 남들이 한다고 군대도 갔다 왔다. 그리고 대학교에 졸업하니 자연스레 취업을 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유학도 도전해 보게 된 것이었다.